이슬의 탄생
이덕규
주로 식물에 기생한다 입이 없고
항문이 없고 내장이 없고 생식이 없어
먹이 사슬의 가장 끝자리에 있으나 이제는
거의 포식자가 없어 간신히 동물이다
태어나 일생 온몸으로 한곳을 응시하거나
누군가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한순간
눈 깜박할 사이에 사라진다 짧은 수명에
육체를 다 소진하고 가서 흔적이 없고
남긴 말도 없다 어디로 가는지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없지만 일설에,
허공을 떠도는 맹수 중에
가장 추악하고 험악한 짐승이 일 년 중
마음이 맑아지는 절기의 한 날을 가려
낳는다고 한다 사선을 넘나드는
난산의 깊은 산통 끝에
온통 캄캄해진 몸으로 그 투명하게
반짝이는 백치의 눈망울을 낳는다고 한다
-​이슬, 밤이라는 짐승이 낳은 반짝이는 백치의 눈망울
그동안 우리 시단에서 ‘이슬’은 햇살, 풀잎 등과 어울리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순결성을 상징하거나 의인화하는 소재였다. 그것은 또한 자신의 내면세계를 표상하는 징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시인은 이런 자연적인 소재인 ‘이슬’을 동물이라고. 그것도 “간신히 동물”이라고 쓴다. 동백꽃이나 왕벚나무를 곰이라고 쓴 시는 있었지만 여기서도 시인은 더 나아간다. 이렇듯 이 시는 시단에서 지금까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시적 인식을 보여준다. 확실히 낯설고 새롭다. 그러나 시는 이렇게 갱신되어가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인식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렇다.
“입이 없고 항문이 없고 내장이 없고 생식이 없”는 “이제는 거의 포식자가 없”는 동물이라는 깜쪽같은 표현, 나아가 “투명하게 반짝이는 백치의 눈망울” “일생 온몸으로 한곳을 응시하거나/누군가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한순간/눈 깜박할 사이에 사라진다” 같은 묘사에 이르면 독자에게 가슴을 치며 그렇구나, ‘이슬의 생사’이구나 실감하게 한다.
시인은 끝까지 이슬이 동물이라는 인식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짧은 수명에/육체를 다 소진하고 가서 흔적이 없고/남긴 말도 없다”에서 임종할 때 자취며 유언마저 남기지 않는 존재라고 멋들어진 유머를 더하기까지 한다. 더욱 재미 있는 것은 밤, 어둠에 대한 묘사다. 시인은 밤을 “허공을 떠도는 맹수 중에/가장 추악하고 험악한 짐승”이라는 은유로 내지른다. 그래서 밤에 내린 이슬이라 하지 않고 밤이라는 짐승이 “일 년 중/마음이 맑아지는 절기의 한 날을 가려” 그것도 “사선을 넘나드는/난산의 깊은 산통 끝에/온통 캄캄해진 몸으로” 낳은 “투명하게/반짝이는 백치의 눈망울”이 이슬이라는 것이다. 백로나 한로 같은 절기를 떠올리게 하지만 그렇게 흉측한 짐승도 저런 맑은 생명을 낳는다는 역설이 먼저다. 더하여 검은 짐승(밤)과 흰 백치(이슬)의 선명한 색채 대비도 부수적으로 따라온다.
단독직입의 시가 가지는 강점도 빼놓을 수 없다. “주로 식물에 기생한다”라고 내지름으로써 시는 에둘러가는 도입부를 줄이는 역할도 하고, 연속적으로 제시되는 ‘낯설게 하기’의 기법을 계속 이어갈 수도 있게 했다. 이슬이라는 짐승! 다시 되새겨 보게 하는 화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