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철이 다가왔다. 2년 전 농가 돕기 행사로 진주교외 어느 농가에 밭에 심어놓은 무를 캐러 간 적이 있다. 30분가량 차로 이동한 산중턱 무밭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한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무잎은 하나도 없고 무들만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무청이 시장성이 뛰어나고 무보다 훨씬 비싼 관계로 밭주인이 무청은 다 걷어가고 무만 일손 부족으로 남겨뒀다는 뒷얘기를 들었다.
이처럼 무가 천대받는 것은 필자가 어릴 때를 생각해보면 정말 상상하기 어려운 반전이다. 어릴 적 고향 집 채전 밭에는 김장용 배추와 무가 심겨 있었다. 모친은 이맘때쯤 월동준비로 채전밭 배추와 무로 김장을 준비했었다.
채전밭에 난 무는 동치미와 깍두기를 충분히 담글 양을 온전히 제공하고도 남았다. 김장용 무에서 남겨진 놈들은 무 구덩이를 만들어 겨우내 저장해 두고 간식으로 했다.
어릴 적 동짓달 긴긴밤 사랑방에서 가마니를 짜시던 부모님은 출출한 배를 채워줄 무를 가져오는 일은 언제나 집안 막내인 필자에게 시켰다. 집 밖 대문을 나가 바람이 휘휘 부는 무 구덩이에서 무를 가져오는 일은 혼자서 공동묘지를 다녀오는 일처럼 무섭고 꺼려지는 일이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무 구덩이 앞에 무릎 꿇고 구덩이 속을 더듬던 필자는 혹시 쥐가 숨어서 내 손을 물지나 않을까 하는 괜한 공포심을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우물에서 길은 찬물로 씻어 양푼 한가득 무를 가져갈 때면 온 가족이 둘러앉아 무를 깍아 먹는 재미에 괜한 뿌듯함에 이 일을 도맡아 했던 추억이다.
필자의 처가는 목포이다. 신혼 초 아내와 나는 좋아하는 음식이 서로 달랐는데, 아내는 겨울철이면 군것질 음식으로 유난히 고구마를 좋아해서 시장에서 사다 먹었다. 아내는 고구마 먹을 때마다 어린 시절 겨우내 동네 이웃이 전해준 해남 고구마 한 가마니를 광에다 두고 밤마다 삶아서 동치미 국물에 먹었다며 자랑했었다. 해남 고구마는커녕 고구마조차 꿈도 꿀 수 없었던 필자는 아내가 무척 부러웠다. 무를 먹고 배출하는 트림과 가스의 고약한 냄새에 추운 겨울밤 방문을 열어젖혀야 했던 해프닝은 아무래도 자랑거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이 들어 반전이 찾아왔다. 어쩔 수 없이 무를 먹던 필자의 입맛은 긴긴 겨울밤 고구마 대신 제주 무를 찾게 되었다. 겨우내 밤마다 출출할 때면 무를 먹는 것이 하나의 버릇처럼 되었다. 무를 먹고 나면 속이 편하고 가스도 잘 나오고 해서 너무나 감사하다고 느낀다. 그런 무의 혜택을 받고 나서부터 고구마를 먹던 아내가 부럽지 않게 되었다.
무는 우리나라 4대 채소 중 하나로 종류가 다양해 출하되는 계절에 따라 월동무, 봄무, 총각무, 열무 등이 모두 제각각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 중 월동무는 뿌리가 단단하고 매운맛이 덜해 생으로 먹어도 달고 맛이 좋다. 바로 필자가 어린 시절 먹던 그 알싸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맛을 내던 무인 것이다. 무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은 유익함을 가지고 있는 구근식물이기도 하다. 무에 함유된 메틸메르캅탄 성분은 감기 예방에 효과적이며, 글루코시노레이트 성분은 독성을 제거해주고 식중독 예방과 항암효과에 좋다.
또 콜레스테롤을 배출시키는 효과가 있어 성인병 예방에 효과적이며, 무에 함유된 아밀라아제와 디아스타제는 단백질과 지방을 분해하는 성분을 갖고 있다. 또 높은 수분 함유량으로 숙취의 원인이 되는 성분을 배출시켜주고 탈수 증상을 막아 숙취 해소에 효과적이다.
무를 먹으면 소화가 잘 되고 술 깨는 데도 좋다는 말은 민간에 떠도는 속설이 아니라 이런 정확한 과학적 검증을 거친 것이다. 무의 뿌리에는 섬유질이 많아 변비 예방에도 좋고 열량은 낮은 반면 포만감이 커 다이어트에도 적합하다. 이러니 내가 고구마 좋아하는 아내에게 큰소리칠 명분은 차고도 넘치는 것이다. 독자분들께도 동짓날 기나긴 밤, 당도 높은 과일이나 목 막히는 고구마보다 소화에 좋고 비타민 C도 풍부한 무를 적극 권해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