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황성공원을 남쪽방향에서 들어가다 보면 임진왜란 때 경주성 탈환의 공을 세운 경주부윤 무의공(武毅公) 청신재(淸愼齋) 박의장(朴毅長,1555~1615)의 《박무의공 수복동도비(收復東都碑)》를 만난다. 애초에 비석은 1861년 경주관아에 세워졌다가 황오동, 인왕동을 거쳐 2001년 현재의 황성공원 자리에 이건 되었으니, 참으로 사연이 많은 비석이라 하겠다.
무안박씨 박의장은 영해부(寧海府) 원고리(元皐里)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공조참의 박영기(朴榮基), 부친은 현감 박세렴(朴世廉), 모친은 영양남씨 남시준(南時俊)의 따님이다. 무안박씨 중시조는 고려조 박진승(朴進昇)으로, 훗날 박지몽(朴之蒙,1445~1555)이 영해박씨와 혼인하며 영해로 이거 하였고, 그 후손 가운데 박의장이 있었다.
19세(1573)에 참봉 이지영(李之英)의 따님과 혼인하였고, 23세(1577)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37세(1591)에 경주판관(慶州判官)을 맡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경주부윤 윤인함의 부덕함으로 백성의 안위와 전쟁의 급박함을 도맡아 행하였고, 이후 경상좌도 관찰사겸순찰사 한효순(韓孝純,1543~1621)에 의해 공로가 보고되어 39세(1593)에 경주부윤이 되었다. 1599년 5월까지 경주부윤을 역임하며, 임진왜란 시 경주부를 수호하고, 경주성 탈환 작전에서 화차(火車)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사용해 큰 성과를 이뤘으며, 사후에 호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영양남씨 시암(時庵) 남고(南皐,1807~1879)는 「제해신문(祭海神文)」을 지어 박의장의 행적을 새긴 《동도복성비(東都復城碑)》를 선박으로 운반하며 비석의 무사 운반을 꾀하였는데, 즉 황성공원에 세워진 《수복동도비》가 경주가 아닌 다른 곳에서 제작되어 뱃길로 운반되었다는 사실을 담고 있다. 祭海神文 바다신에게 바치는 글.경신년(1860) 박 무의공 동도복성비(東都復城碑) 배로 운반할 때 지난번 임진년에 왜선이 바다를 건넌 것은 바다신의 부끄러움이었지만 당시에 무의공 박의장이 계셔서 동경을 되찾아 바다가 다시 편안히 흐르고, 끼친 은덕은 백성에게 머물러 오랫동안 잊지 못할 일이었다. 용머리 장식에 공로를 새기고 수레에 실어 육지로 운반하는데, 많은 소들이 머리를 돌리어 뱃길을 통해 이 일을 도모하였다. 이백여 년 동안 이 돌은 바다를 떠다니다가 신의 아름다운 보호로 고래와 용도 두려워 복종하고, 바람신의 도움으로 뱃사공들이 칭송의 노래를 부른다. 제문을 보면 무거운 비석을 운반하려면 일만 마리의 소도 고개를 돌려버릴 것이라며 차라리 물길을 통해 운반하는 것이 더욱 수월함을 암시한다. 실로 경주부윤 박의장이 이룬 업적이 큰 것임을 비유하는 말로 그의 치적을 높이 평가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정확히 어느 곳에서 비석이 제작되어 경주땅으로 들어왔는지 증거할 자료가 부족한 상황이지만, 영해 원구리에 사는 남고선생이 제문을 지은 것을 추측해보면, 영해 방면에서 동해바다를 통해 경주부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다. 영해면 원구리에 영양남씨, 무안박씨, 대흥백씨 등 3성이 대대로 살았다. 영양남씨 역시 의병활동에 적극적이었는데, 특히 난고(蘭皐) 남경훈(南慶薰,1572~1612)은 부친 그리고 남의록(南義祿)과 함께 의병에 가담하였고, 문천회맹과 경주성 수복에 큰 역할을 하였다.
경주의 인물인 우암 남구명(南九明,1661~1717)은 영해 원구리에서 경주부 영호(影湖)에 이거하였고, 의병장 남경훈의 증손자이다. 남고는 류치명(柳致明,1777~1861)의 문인으로, 우촌(雨村) 남상교(南尙敎,1783~1866), 정헌(定軒) 이종상(李鍾祥), 동림(東林) 류치호(柳致鎬,1800~1862), 정와(訂窩) 김대진(金岱鎭,1800~1871) 등과 교유하였다. 1860년 6월에 「박무의공동도복성비명병서(朴武毅公東都復城碑銘幷序)」를 지은 고계(古溪) 이휘령(李彙寧,1788~1861) 역시 허임(許恁), 류태좌(柳台佐), 경주부윤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1792~1871), 경주의 이종상 등과 교유하며 글을 주고받았다.
이는 여러 인물들과 혼반(婚班)을 통해 다양한 인맥을 구성하였고, 글을 주고 받는 상황에 특히 경주의 이종상 등이 비석에 관여하였을 것으로 판단되며,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게다가 경주성 수복의 주역이 박의장 또는 영천과 신령의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와 권응수(權應銖) 등의 공로도 기억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어 논란이 가중되는 점도 없지 않아 있다. 그래서 이 비석이 갖는 의미가 더욱 비중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