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트(F.Liszt/1811-1886)는 음악신동이었다. 그래서 리스트의 아버지 아담(그는 하이든이 몸담았던 헝가리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집사였다)은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처럼 일찌감치 아들을 위한 유럽연주여행을 기획했다. 덕분에 리스트는 체르니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살리에리에게 작곡을 배울 수 있었다. 연주여행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아담의 이른 죽음(1827년/리스트 나이 16세)때문에 리스트는 졸지에 소년가장이 되었다. 자신의 유일한 재능인 음악으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 그래서 일자리를 위해 어머니 안나와 함께 프랑스 파리로 이주한다.
리스트는 파리에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피아노 레슨은 그의 중요 수입원이었다. 제자 중에는 프랑스 유력인사의 딸인 카롤랭 드 생크릭(Caroline de Saint-Cricq)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리스트의 생애 첫사랑이었다(1828년). 하지만 카롤랭 부친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 둘은 곧 헤어지게 된다. 첫사랑의 상처는 너무나 컸다. 리스트는 종교(가톨릭)에 귀의할 생각도 했다. 어머니의 만류로 성직자가 되려는 꿈은 접었지만, 실연의 아픔은 꽤 오래 갔다. 대신 당대의 유명작가였던 빅토르 위고(V.Hugo/1802-1885)와 하인리히 하이네(H.Heine/1797-1856)의 문학세계에 빠졌다. 큰 형님뻘인 베를리오즈와도 친분을 이어갔다. 리스트는 그들을 통해 낭만주의라는 거대한 흐름에 발을 담굴 수 있었다.
리스트에게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된 이벤트가 1832년 파리에서 열렸다. 당대 최고의 인기 바이올리니스트였던 파가니니(N.Paganini/1782-1840)가 콜레라로 희생당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콘서트를 연 것이다. 리스트는 이때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고 큰 충격에 빠진다.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파가니니의 화려한 연주기교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리스트는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기로 결심한다. 리스트가 아니면 칠 수 없다는 ‘초절기교 연습곡’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한 것이다.
파리 사교계의 떠오르는 신성이었던 리스트는 1833년 마리 다구(Marie d`Agoult/1805-1876)라는 귀족부인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리스트의 아이를 셋이나 낳는다. 이중에 유일한 생존자가 훗날 바그너의 부인이 되는 코지마(Cosima/1837-1930)다. 아무튼 다구부인은 리스트의 20대를 함께했다. 상드가 쇼팽보다 6살 연상인 것처럼, 다구도 리스트보다 6살이 많다. 다구 부인은 연상이지만, 상드처럼 모성애로 충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공주기질이 강했다고 한다. 다구부인은 리스트가 자신의 곁에 늘 머무르길 원했다. 하지만 리스트가 이를 무시하고 순회공연을 강행하자 이들 사이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1840년대 리스트의 순회공연은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 갓 30대에 접어든 키 큰 미남은 압도적인 연주 실력과 쇼맨십으로 좌중을 사로잡았다. 그의 연주를 듣다가 기절하는 여성들이 속출했다. 연주가 끝나면 보석을 무대로 던지는 여성들도 있었다. 오늘날 아이돌의 팬덤(fandom)을 보는 듯하다. 하이네는 이들을 리스토마니아(Lisztomania)라고 명명했다. 리스트는 인류 최초의 아이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