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령 최병익 선생이 23일부터 7일 동안 서울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 ‘부지노지(不知老至) 남령최병익 작품전’을 연다. 이번 작품전은 남령 선생의 또 다른 시도인 조각보 디자인을 전격 선보이며, 이 시도가 어떤 반응을 불러 일으킬지 기대를 키우고 있다. 지난 2021년 9월, 남령 최병익 선생의 작업실인 ‘필소헌(筆笑軒)’을 찾은 기자는 선생이 꺼내놓은 작품들에서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선생의 글씨나 미소 달마, 소나무 그림은 자주 보아 낯이 익었지만 오색으로 꾸민 화선지는 도무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의아해하는 기자에게 선생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내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함께 동행했던 변성희 교수가 “조각보 아닙니까?”고 가로질렀다. 기자 역시 어릴 때 밥상을 덮던 상보의 문양을 막 떠올리고 있을 때라 얼떨결에 “저도 그렇게 보입니다”며 맞장구쳤다. 남령 선생이 허허 웃으며 자못 진지해진 모습으로 한 장 한 장 작품들을 넘겼다. “언젠가부터 서예가 일반인들의 마음에서뿐만 아니라 눈에서도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서예가로서 이만큼 안타까운 일이 없지요. 지금까지 서예가란 사람들이 지나치게 자기 틀에만 갇혀서 새로운 서예의 흐름을 만드는 것은 고사하고 세상의 변화조차 따라가지 못한 결과입니다. 제가 나름대로 그 틀을 부수겠다고 힘써 왔는데 이번 시도도 그런 마음을 반영한 것입니다” 남령 선생은 전통적인 서예를 누구보다 철저히 연구하고 깊이 있게 실현해 온 서예가다. 특히 추사체에 각별한 뜻을 두고 정진해 추사체에 관한 한 가장 독보적인 경지에 올라 자타가 공인하는 추사체의 전승자가 됐다. 특히 남령 선생은 서예가들의 희구하는 중봉(中鋒)의 진정한 묘리를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가장 가깝게 구현하는 서예가로 알려져 있다. 이렇듯 전통적인 서예의 기법을 혼신을 다해 붙들어 온 남령 선생이지만 출구가 막힌 서예를 조금 더 친숙한 예술 장르로 승화시키기 위해 새로운 서예의 문을 열기 위한 실험적인 시도들을 꾸준히 해왔다. 선생의 대표작인 ‘미소달마’는 달마의 근엄하고 기괴한 형상을 180도 바꿔 온화하고 밝은 달마로 바꾸었다. 이전 서예가들이 솔잎을 하나하나 그리던 기법을 전면 철회하고 바람 속에 동화되어 흔들리는 유려한 소나무 그림으로 다시 표현해냈다. 그런가 하면 2019년 5월 인사동 한국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에서는 본격적으로 조형감각을 입힌 문자도를 선보여 파격적인 서예의 변형을 유감없이 드러내기도 했다. 당시 전시회를 찾은 서예가 정종섭 국회의원(현 국학진흥원 원장)은 남령 선생의 문자도를 보며 “조형을 고려한 서예의 개척이야말로 새로운 기풍을 열어가는 현대 서예작가들의 숙제인데 남령 선생이 그 어려운 길을 걷는다”며 예찬한 바 있다. 그런 남령 선생에게 조각보 디자인은 또 다른 새로운 파격이자 신선한 충격이다. “서예가 어쩌다 보니 남성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서예도 엄연히 예술의 범주에 들어가는데 실상 현대에 들어서는 여성들이 예술을 더 즐기고 구매하는데 말이지요. 그래서 남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작품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고 그 방법으로 조각보를 떠올린 것입니다” 남령 선생은 ‘조각보에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들어 있을 뿐 아니라 일상에서 찾을 수 있었던 몇 가지 안 되는 생활 속 미술이 숨어 있었다’고 강조했다. 누군가에게는 조각보 그 자체로 또 누군가에게는 밥상을 덮었던 따스함으로 기억되는 문양을 화선지에 구현하고 보니 그 자신 묘한 설렘이 느껴지더라는 것이다. 작품을 보면서 바탕인 오색의 문양에는 단아한 여인의 향훈이 서려 있고 그 위에 웅혼한 남성의 기백을 담은 글씨가 펼쳐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온갖 다채로운 색들은 우리나라 궁궐이나 절에서 보듯 음양오행을 맞춘 단청의 의미도 있어 전통의 또 다른 표현으로 손색없다. 서예에 음양과 오행의 조화가 서린다면 어쩌면 남령 선생의 이번 작품이 그 첫 번째 시도가 아닐까? 그 감흥이 아직도 도도한 중에 드디어 11월 23일 전시회 일정을 잡은 것이다. 전시회에 앞서 선생이 보낸 전시회 도록에는 예의 단아한 조각보 디자인을 바탕으로 한 웅혼한 글씨가 유감없이 펼쳐져 있다. 이번 전시회는 인사동 ‘핫플’로 손꼽히는 ‘경인미술관’에서 개최된다는 것이 또 다른 즐거움이다. 경인미술관은 인사동에서 가장 선호도가 높은 미술관인데다 젊은이들과 여성들이 특별히 더 즐겨 찾는 전통찻집이다. 고풍스런 한옥을 미술관과 전통찻집으로 바꾸어 1년 365일 예향과 다향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이 찻집을 찾는 고객들은 차와 함께 예술을 찾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남령 선생의 조각보를 바탕으로 한 서예작품이 전시되기에 이만큼 적절한 곳이 없을 것이다. 서예는 대표적인 전통 예술이다. 누군가는 이를 철두철미 연구하고 계승·발전시켜야 한다. 그러나 참다운 서예를 알아보는 이들도 점점 사라지고 그런 만큼 대중들에게 어려워진 서예가 사랑받을 길도 좁아졌다. 이런 절체절명의 시대, 남령 선생의 조각보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다면 서예사에 그 이상 다행한 일이 없을 것이다. 이번 작품전 이름이 ‘부지노지’이다. 신선한 시도에 몰두해온 남령 선생이 늙은 것조차 알지 못할 만큼 심혈을 쏟아부었다는 뜻이다. 이번 작품전이 몹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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