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를 듣고,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마음에 착잡하다. 안타까운 현장이 반복되어 보도되는 만큼 그 현장에 있었거나, 혹은 변을 당한 이들의 부모나 형제, 친척의 마음들이 사무치게 다가와서 며칠 복잡하다. 자식 잃은 부모 마음에 대해 다른 어떤 나라보다 동질감을 느끼는 대한민국으로 더더구나 남의 일이 아니다. 사후 약방문이라고 여러 가지 문제의 원인을 조사하고 있고, 사고 책임자를 색출하려는 시도 또한 만만찮다. 필자는 이 논의에서 좀 벗어나 핼러윈데이가 우리 문화로 정착되어 가는 듯한 분위기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생소한 듯하면서 생소하지 않은 핼러윈데이, 도대체 어떤 날이기에 젊은이들이 열광하며 기쁨에 넘쳐 거리로 달려 나가게 했다는 말인가? 한 나라의 문화가 중요한 것은 어릴 때부터 마음과 생각과 몸에까지 스며들어 무의식중에 그 문화 속에서 집단 혹은 자신만의 창조물을 생산해내기 때문이다. 그 문화 속에서 하나하나를 보면 매우 개성적이고 남과 다른 특별함을 느끼겠지만 이방인의 눈으로 보면 공통분모를 이루며 거의 일치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문화다. 우리의 명절은 아름다운 문화로 기억되기보다는 어느 순간 제사, 노동, 시댁이라는 단단한 부정적인 키워드로 무장된 변화되지 못할 폐단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런 사고의 고착은 부부 갈등의 원천이기도 하다.   부부 즉 남녀 간의 존중과 평등이 아닌 한쪽의 희생으로 몰아갔던 구시대의 잘못된 사고가 결국 명절을 기점으로 갈등이 폭발되고, 급기야 기성세대를 비롯하여 MZ 세대들까지 긴 휴가로 변질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핼러윈데이는 북유럽 켈트족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미국으로 넘어간 켈트족 거주지역 아일랜드 및 스코틀랜드의 미국 이민자들이 벌였던 소규모 축제가 점차 미국을 대표하는 축제로 정착되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나라의 청소년과 MZ세대들이 핼러윈데이를 축제로 여기게 되었을까? 우리나라의 Z세대들은 유아기의 교육기관인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교육받고 자란 세대이다. 게다가 조기 학습 열풍은 영유아기에 영어를 배우는 과정을 도입하게 했고, 그 언어에 묻어 영어권 문화가 유입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린이집, 유치원 그리고 초등학교는 10월 31일, 핼러윈데이가 공식 축젯날이다. 아이들이 흥미를 느끼는 퍼포먼스에 핼러윈데이의 가면은 매우 적합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라 짐작된다. 거의 13~4년 동안 핼러윈 문화에 노출되고 즐기도록 교육기관에서 공식적인 날로 만들었다. 또한 사설학원에서의 핼러윈 축제 분위기는 더욱 화려하다. 사설학원의 의존율이 높은 우리나라로 볼 때 우리 아이들이 핼러윈데이가 우리의 축제처럼 여기는 것은 매우 당연해졌다. 생각해보자. 전국이 같은 날에 청소년들이 직접 참여하는 날, 흥분되지 않았을까? 이것은 지역을 불문하고 공통된 주제가 되어 이야깃거리도 풍성하다. 재미도 있다. 이는 축제로 정착되는 요소를 전부 포함하고 있다. 존중과 함께 참여하기는 힘들지도 모르는 노동조차 행복한 축제의 시간으로 만들어 준다. 세계의 많은 축제는 많은 인원이 참여하고, 행사의 준비와 마무리, 그리고 많은 양의 음식이 제공되어야 하므로 노동을 수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우리의 축제들은 왜 없어졌을까? 흥이 많아 일 년에 24절기를 만들고 명절을 만들어 마을 단위, 가족 단위로 함께 하는 축제를 즐겼던 우리의 문화는 거의 사라지고 지자체에서 보여주기로 이루어지는 행사로만 남아 있다. 축제와 행사는 다르다. 축제는 같이 준비하고, 같이 참여하고, 같이 마무리하는 것이지만 행사는 어떤 주관업체가 행사를 위해 대행하는 퍼포먼스에 지나지 않는다. 당연히 우리는 관객으로 동원되어야 하는 ‘사람들’ 일뿐이다. 우리의 축제가 사라지는 이유를 생각해보고, 기다려지고, 준비하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웃음을 주는 축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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