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만(R.A.Schumann/1810-1856)의 아버지는 출판업자였다. 그래서 슈만은 어릴 적부터 문학을 비롯한 다양한 책들을 접할 수 있었다. 음악적 재능도 출중했다. 하지만 음악을 전공할 순 없었다. 아버지가 사망(1826)하자, 어머니는 보다 안정된 미래를 위해 법학을 전공하길 원했다. 슈만은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법학과에 진학한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을 막을 순 없었다. 수소문 끝에 비크(Wieck/1785-1873) 교수의 제자가 된다. 그는 스승의 지도를 받으면서 맹렬히 피아노 연습을 했다. 또래였던 쇼팽이나 리스트처럼 피아노를 잘 치고 싶었다. 하지만 오른손에 마비가 왔다. 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었다. 무리한 피아노 연습이 그만 화를 부른 것이다. 슈만은 아쉽게도 20대 초반에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꿈을 접는다. 그리고 작곡과 평론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슈만은 낭만주의 작곡가일 수밖에 없다. 그의 문학적 내공과 음악창작능력의 결합은 최고의 낭만주의 작품을 잉태해냈다. 그의 부친 덕분이다. 그리고 슈만은 음악신보를 창간(1834)한다(이 잡지는 현재도 발간되고 있다). 그는 이 평론지를 통해 신예음악가 발굴에 큰 공을 세웠다. 베를리오즈, 쇼팽, 브람스 같은 쟁쟁한 음악가들이 슈만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슈만의 피아노 스승 비크에게는 어여쁜 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클라라(Clara/1819-1896)다. 슈만이 클라라를 처음 봤을 때, 그녀의 나이는 9살이었다(슈만은 18살). 슈만이 피아니스트의 꿈을 포기하고, 음악신보를 창간하여 활동을 하는 동안 클라라는 폭풍 성장하여 여인으로서 슈만의 마음을 훔친다. 슈만은 클라라에게 청혼을 한다. 하지만 비크 교수는 이들의 결혼에 결사반대다. 슈만의 미래가 어둡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슈만은 비크 교수와 소송 끝에 클라라와의 결혼(1840)을 쟁취해 낸다. 소송과정에서 슈만을 알콜 중독자라 허위 주장까지 한 비크는 후에 사위가 된 슈만에게 결국 사과를 한다. 슈만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23살(1833)에 이미 자살시도를 한 적이 있다. 일각에서는 슈만에게 2개의 자아가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하나는 플로레스탄(Florestan)이고, 다른 하나는 오이제비우스(Eusebius)다. 이 2개의 자아는 서로 상반된 성향을 갖고 대립한다. 슈만은 글의 내용에 따라 평소 이 두 개의 필명을 사용했다. 54세(1854)에 라인강에 뛰어들어 또 한 번의 자살시도(다행히 뱃사공이 물에 빠진 슈만을 구해준다)를 하고,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그리고 2년 후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오늘날 슈만이 죽은 병원은 ‘슈만병원’으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