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는 구비문학으로 민중들의 일상적인 대화이며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지 않고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전해 내려온 서민들의 이야기이다. 설화는 민족의 전통사상과 가치관, 정서와 문화가 담겨있고, 전설과 민담도 설화에 포함된다. 또 설화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문학으로 발전하여 민족의 스토리텔링의 자원이 된다. 우리나라 개에 관한 설화는 구전민담에서 시작하여 문자로 기록되어 전해 내려온 것이 대부분이다. 개에 관한 설화를 유형으로 구분하면 진화구주형(鎭火救主型)·투호구주형(鬪虎救主型)·방독구주형(防毒救主型)·폐관보주형(吠官報主型)·수사부고형(守死訃告型)·수주해난형(守主解難型)·원로전서형(遠路傳書型)·산로개척형(山路開拓型)·폐적보국형(吠賊報國型)·변신제거형(變身除去型)·보은순사형(報恩殉死型)·환생축복형(還生祝福型)·수유구아형(授乳救兒型)·명당점지형(明堂點指型) 등이 있다. 경주지역의 개에 관한 설화는 내남이조 경주 최부자집 이야기와 삼효각의 개 이야기 등이 있다. 최부자집 개 이야기는 진화구주형(鎭火救主型) 유형에 속하고, 얼마 전에 이 지면을 통해 소개했다. 이번에는 경주 삼효각의 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삼효각의 개 이야기는 수시부고형(守屍訃告型) 유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경주 삼효각은 현재 오릉 왼쪽 편에 있다. 본래 나정 남쪽에 있었던 금광제(金光提,현재는 메워서 논이 됨) 위쪽에 1561년(명종 16년) 윤5월 21일에 효자정려(孝子旌閭) 받은 사실을 현창(顯彰)하기 위해 정려각(旌閭閣)을 건립하였고, 1942년에 오릉 남쪽의 귀호 들녘으로 옮겼다가 1970년대 중반 오릉 확장 정비공사로 주차장 부지 내에 들어가면서 탑동 400-4번지인 현재 위치로 다시 옮겼다. 삼효각은 김응벽(金應璧, 참봉, 정려), 김응규(金應奎, 좌통례, 정려), 김응정(金應井, 인의, 정려) 삼형제의 효 행위를 알리는 문화재다. 삼형제의 효는 조선시대에 효행으로 정려를 받은 경주(慶州) 효자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삼강행실도』, 『동경잡기』, 『금오승람』, 『경주시사』, 『왕도경주』 등의 문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기록에 삼형제과 키웠던 개에 관한 이야기도 함께 전하고 있다. 『동경통지』에 “김응벽(金應壁), 응규(應奎), 응정(應井) 세 형제는 우애가 돈독하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심에 세 형제는 산소 곁에 여막(廬幕)을 지어놓고 시묘(侍墓)를 살면서 큰 비바람이 몰아쳐도 떠나지 않고 항상 단에 올라 곡(哭)하였는데 세 형제가 다녔던 길이 깊게 파일 정도였다. 하루 저녁에는 엄청난 비가 내리는데 갑자기 소리가 들려 세 형제가 머리를 맞대고 들으니 돌아가신 아버지 음성이라 놀라서 밖으로 나와 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잠시 후 또 그 소리가 들려 괴이하게 여기고 신주(神主)를 안고 함께 나와 주위를 살피는 찰나에 여막 북쪽 산 좌우가 붕괴하여 여막을 덥쳤다”한다. 시묘살이 중에 개 한 마리를 키웠는데, “이 개는 시묘살이는 하는 삼형제의 집안과 소통하는 역할을 하였다. 개의 목에 삼형제의 편지를 매달아 집으로 보내면 개가 알아듣고 삼형제의 집을 오고 가면서 시묘살이 사정을 전달하였고, 집에서도 역시 개의 목에 편지를 매달아서 시묘살이를 하는 삼형제에게 집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전달하였다 한다. 이 개를 동네에서 신춘(神春)이라 불렀다. 삼형제는 시묘살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아침과 저녁으로 반드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경건하게 한평생 가묘(家廟)에 참배를 하였다”고 기록되어 전하며 이 사실을 나라에서 전해 듣고 명종 16년(1561)에 정려(旌閭)하였다. 이 기록은 명종실록 27권, 명종 16년 윤5월 21일 경술 2번째 기사 1561년 명 가정(嘉靖) 40년 유학 김응벽(金應璧)을 포장하다는 기록이 있다. 幼學金應璧 【慶州人。 性本純厚, 兄弟友愛, 相與和樂, 以養父母。 其遭喪, 一遵古制, 應璧親負土石以葬。居廬之日, 霖雨浹旬, 一夕有聲, 自父墳呼應璧者三。 應璧聞聲驚動, 上墓彷徨之際, 北山崩,壓廬舍。】 최석규 경주개 동경이 혈통보존연구원장 경주신문 독자위원 이 기사는 지역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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