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집트 이집트는 아프리카의 북동쪽에 위치하며, 사하라 사막 안에 놓여 있다. 북으로는 지중해, 남쪽으로는 수단, 서쪽으로는 리비아, 동쪽으로는 이스라엘과 홍해를 접하고 있다. 인구 7천만명, 면적은 백만㎢로 한반도의 약 4.6배에 달한다. 그러나 전체면적의 95%가 사막이다. 사막성기후로 연간 평균 강우량이 15~20㎜로 거의 비가 내리지 않는다. 따라서 신경통이 없고, 무좀이 없으며, 자동차 폐기연한이 없다고 한다. 남쪽에서 북쪽의 지중해 방향으로 흐르면서 이집트를 횡단하는 길이 6천750㎞의 나일강이 이집트의 유일한 수원이며 젖줄이자 생명선이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막강한 군대로 평가되는 60만명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 경찰은 35만명, 그러나 비밀경찰이 많다고 한다. 감시차원의 종교경찰을 포함해 인구 3명중 1명은 비밀경찰이라고 하니 그야말로 경찰국가이다. 국교는 이슬람교, 인구의 92%가 이슬람교도들이고 나머지는 기독교인이다. 1인당 GNP는 1천3백$, 빈부간의 격차가 아주 심하다. 우리나라와는 지난 95년에 대사관계를 맺었고 북한과는 지난 73년에 이미 국교를 터고 있었다. 대통령관저는 카이로 공항에서 카이로 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었고 대통령 관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건립했다는 전쟁기념관이 있었다. 수도 카이로의 인구는 1천7백40만명으로 사막위에 세운도시이다. 모든 물은 나일강에서 공급하였고 가로수 등 모든 나무들은 물을 주면서 길러야했다. 공항과 대통령관저가 있는 일부도로를 제외하고는 도로의 차선이 거의 없거나 있어도 무시되고 신호등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도로는 차량과 마차, 자전거, 오토바이, 보행자들이 마구 뒤섞여 아주 혼잡하고 무질서했다. 거리에는 현대, 대우 등 우리나라 차들이 많이 다녔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보기어려운 구형 포니가 아직도 택시로 이용되고 있었다. 건물들이 미완성인 채 철근들이 노출되어있었다. 건물들이 낡아 보이고 먼지가 쌓여 매우 지저분해보였다. 비가내리지 않으니 사막의 모래바람으로 건물에 달라붙어 있어 얼마 되지 않은 건물이지만 아주 낡아보였다. 이집트 카이로에 갔을 때 이곳은 이슬람교도들의 해가 있는 낮동안에는 금식을 하는 라마단기간이었다. 10월27일부터 시작한 라마단은 약 한 달간이며 낮에는 일체 음식을 먹지 못한다. 담배나 껌은 물론 심지어 물조차 마시지 못한다. 그래서 이 기간에 노약자들이 쓰러지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라마단기간에는 오후 2시반이면 일과를 마친다. 때문에 여행도 이에 맞추어야 하기 때문에 카이로에서의 첫날 일정은 오후 4시경에 마칠 수밖에 없었다. 공항에서 카이로 시내까지는 20분 거리에 있었고 가는 길에 공동묘지인 무덤집들이 도로 양 옆으로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이곳은 죽은 자와 같이 살아가는 빈민촌이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 지금은 전기와 수도, 상점들도 들어서 있어서 생활에 큰 불편이 없다고 한다. 1. 고고학박물관 박물관 입구 작은 연못에는 상하이집트를 상징하는 파피루스와 연꽃이 심어져있었다. 파피루스는 4각진 줄기식물로 이를 이용해 종이를 만들어 문장와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연꽃은 일종의 수련이었다. 2층 건물 약2천여평의 전시공간에 10만점의 유물을 전시했다. 석상같은 규모가 큰 유물들이 많아 빼곡히 진열해 놓은 박물관은 전시장이기보다는 마치 창고 같은 느낌이 들었다. 2층은 파라오 투탄카멘의 무덤에서 나온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3천3백년전의 유물들이 색상과 문양이 선명하게 잘 보존되어있었다. 세계최초의 파피루스 종이와 그기에 아로새겨진 상형문자들, 파라오가 입었던 옷과 장신구들이 거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석조유물이나 금속유물은 물론 종이나 옷이 모두 깨끗하게 수천년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이집트가 거의 비가 내리지 않는 건조한 기후를 가진 땅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목조유물은 물론 석굴암처럼 석조유물조차 제대로 보존되지 않아 갖은 어려움을 겪는 경주로써는 그러한 면은 참 부럽다. 석조유물들의 조각 솜씨도 대단했다. 마치 비누조각을 다듬은 듯이 정교하고 매끈하게 조각된 석조유물들에서 빼어난 솜씨는 뛰어난 예술성을 엿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석회암은 조각이 용이하겠지만 화강암의 경우도 조각솜씨가 빼어났다. 물론 재질은 우리의 화강암보다는 재질이 단단하고 입자가 조밀한 석질로 보였다. 그리고 파라오의 관이 7단계로 구성되어 있음에 놀랐다. 미이라를 만든 파라오를 황금관, 또 황금관에 담고 석관, 목관 등으로 7단계를 거치니 집체만한 거대한 관이 되었다. 미이라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던 수술대가 화강석을 경사지게 다듬어져 있었다. 약 3천여년전에 만들었다는 검은 화강암으로 된 석관의 문양이나 상형문자들이 마치 비누공예를 한 것처럼 섬세했고 방금 채석장에서 가져온 것처럼 형체가 원형그대로 마모도 없이 보존되어있었다. 2층에는 기원전 1361년에 1352년까지 1922 영국의 고고학자 포드카타에 의해서 발굴, 왕가의계곡에서 발견 투탕크아몬 9살에서 18살 도굴되지 않고 영국의 고고학자에 의해 발굴된 유일한 파라오의 무덤 람세스6세 무덤옆에 있었다. 기원전에 이미 도굴된 이 무덤에서 파낸 모래를 쌓았는데 그 모래더미가 이 무덤의 입구를 막았고 또 어린왕으로 잘 알려지지 않아 관심의 대상이 되 않아 도굴로부터 보호 113키로 황금으로만든 금관 3300년전에 만들어진 유물들이다. 세계최초의 종이인 파피루스가 온전하게 남아있었다. 습도가 없기 때문에 그기에 아로새긴 씨에로클리프 문자들의 색상과 글씨가 기원전 3200년전부터 4세기까지 사용했던 문자가 문자를 쓰던 사제들을 신전에서 내 보내다가보니 문자가 사라졌다. 850개로 구성된 상형문자이면서 150개가 음가를 지닌 음성상형문자. 두개골이 함몰되어있어 사자들에 의해 사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나무로 만든의자에 도금을 해 놓은 의자들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투탄크아몬의 석상은 사람의 인체구조와 근육의 굴곡까지도 섬세하게 표현한 돌을 다루는 기술은 놀랍다. 팬티, 장갑, 양말 등 섬유로 만든 왕이 사용했던 것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손가락, 발가락을 끼우고 황금마스크를 씌우고 작은 금관, 큰 금관, 석관, 더 큰 석관, 순으 로 7단계로 관을 만들어 시신을 보관했다. 신라인들은 돌을 떡 주무르듯 한다고 했는데 그들의 도 다루는 솜씨는 [피라미드] 피라밋과 스핑크스가 있는 기자지역은 카이로에서 자동차로 10분거리에 있다. 나일강을 건너 카이로의 서편은 죽음의 땅이다. 이곳은 파라오들의 무덤집인 피라미드가 있다. 피라미드는 지금으로부터 4500년전의 무덤. 사막의 모래위에다 세운게 아니라 사막 가운데 있는 암반을 평평하게 깎아 그 위에 세웠다. 그래서 지진등 외부의 충격을 암반이 흡수해 주기 때문에 견디고 지금까지 보존할 수 있었다. 돌하나의 무게가 약2톤에서 10톤까지 200만개 피라미드는 원래 사막 가 운데 건립했지만 지금은 카이로가 계속 팽창해 피라미드 주변까지 도시가 형성되어 지금은 카이로의 바로 옆에 피라미디가 있는 것 같은 모습이 되었다 세계7대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높이137m 가로230m 세로230m 네 변이 동서남북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다. 650만톤이다. 카프레왕의 피라미드이고 134 210 210 이면서 94개의 피라미드가 발견되었다. 꼭대기에는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삿갓을 쓴 것 같다고 해서 삿갓피라미드 그중에서 가장 완벽하게 원형이 남아있는 피라미드들이 기자지역에 남아있다. 날씨가 선명하고 맑아 원형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맨카오레왕의 피라미드 15세기까지 껍질이 덮혀있었다. 돌은 빛을 반사하지 않지만 피라미 드의 마지막 장식돌에 곰 가죽등으로 장식해 빛을 발하게 했다. 기자지역의 피라미드들은 출입구가 모두 북쪽에 있었다. 사람들이 들어가는 통로와 파라오 들의 통로는 그 위에 있었다. 그래서 통로는 2개가 있었다. 맨카오레왕의 피라미드가 있었고 그 옆에 규모가 작은 왕비들의 피라미드도 있었다. 사막에 흩어져있는 피라미드들이 멀리에 보였다. 14.5세기까지는 껍질이 씌워져있었다. 그리고 껍질돌에는 곰 가죽등으로 장식 빛을 발하게 2. 피라미드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세계 최대의 건조물인 피라미드는 고 왕국의 전성기인 기원전 2700년경에 만들어졌다. 이집트 전체에서 94개의 피라미드가 발견되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기자지역의 피라미드로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쿠푸왕의 피라미드의 경우 268만여개 정도의 각 2.5t 내지 10t 의 화강암으로 구성되었다. 총 무게가 6백50만톤이다. 석회암은 모깔담과 기자 남동쪽 15km 지점의 엘뚜르 등에서 캐내어 이용하였고 화강암은 카이로 남쪽 960km 떨어진 아스완에서 나일강을 통하여 운반해 왔다. 돌을 쌓은 단층의 수는 원래 210계단 이었으며, 현재 남아있는 것은 203계단이다. 하루 10만여명이 1년에 3,4 개월씩 20여년(총 2천여일) 동안, 연인원 2~3억명이 동원된 대규모 공사로서 용도는 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밑변의 길이 230.3m, 겉표면에 있었던 돌의 17만여개는 아랍과 터키 점령하에서 건축자재로 재활용 되느라 벗겨졌다. 칼리프 알마문이 뚫은 구멍을 통해 내부로 들어갈 수 있으며 원래의 입구는 이보다 위쪽 10m 지점에 위치해 있다. 피라미드의 가장 경이로운 점은 아마도 그 거대한 구조물의 방향일 것이다. 각 능선은 거의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 그 각도의 오차는 진북(眞北)에서 5분 밖에 벗어나 있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도 미미한 것이어서, 우연의 배열의 결과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또한 현대 20세기의 건축물로도 따라갈 수 없는 정확성은 도저히 인간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이다. 105 m 높이의 상승통로는 완벽한 배열에서 1 cm 도 벗어나지 않았으며, 이 피라미드가 건조될 당시 천구(天球)의 북극에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던 용자리의 알파별을 지표로 삼아 이 통로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2. 스핑크스 - 인간 여자의 머리에 사자의 몸뚱이에 날개를 가진 괴물 - 괴물 에키드나와 튀폰(또는 키마이라와 오르토로스)의 자식이며, 형제인 네메아의 사자가 네메아 땅을 황폐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스핑크스는 여신 헤라의 명령을 받아 테베에 건너가서 그곳 사람들을 괴롭혔다. 이집트에서 기원하여 후에 시리아, 아나톨리아, 지중해, 그리스 본토등지로 전파되었다. 그리스에서는 처음에 죽음을 감시하는 신화적인 존재로서 액막이의 목적으로 방패나 묘 등에 조각하였는데, 후에 테베의 전설을 둘러싸고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테베의 창설자인 카드모스는 황소로 변신한 제우스가 납치해간, 에우로페의 오빠이다. 이런 이유로 헤라는 테베에 대하여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 원한을 풀기 위해서 헤라는 스핑크스를 테베로 보냈다. 테베시의 사람들은 대로를 횡단하는 한 괴물 때문에 괴로움을 당해야 했다. 스핑크스는 바위에 앉아 길가는 사람을 막아 세우고 그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주며 그것을 푸는자는 무사히 통과할 수 있으나 풀지 못하는 자는 생명을 잃을 것이라고 위협하고 있었다. 신탁에 조언을 구했다. 누군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기만 하면 스핑크스가 자살을 할 것이라는 신탁이 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푼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없었으므로 모든 통행인인 피살되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오이디푸스는 조금도 겁내지 않고 대담하게 스핑크스에게로 나아갔다. "아침에는 네 발로 걷고, 낮에는 두 발로 걷고,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동물은 무엇인가?" 하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에 오이디푸스는 대답했다. "그것은 인간이다. 인간은 어릴 때에는 두 손과 무릎으로 기어다니고, 커서는 두 발로 서고, 늙으면 지팡이를 짚고 다니기 때문이다." 스핑크스는 굴욕을 느끼고 바위 밑으로 몸을 던져 죽어버렸다. 테베시 사람들은 오이디푸스를 그들의 왕으로 모시고 여왕인 이오카스테와 결혼케 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그는 전혀 행운아가 아니었다. 오이디푸스는 이미 자기의 아버지인지도 모르는 채 아버지를 살해했고, 이번에는 여왕과 결혼함으로써 자기 어머니의 남편이 된 것이다.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세계 최대의 건조물인 피라미드는 고 왕국의 전성기인 기원전 2700년 경에 만들어졌다. 이집트 전체에서 지금까지 94개의 피라미드가 발견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기자 지역의 피라미드로서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쿠프왕의 피라미드의 경우 돌 하나의 무게가 2.5톤에서 10톤으로 총 650만톤 약 268만개의 돌로 만들어졌다. 석회암은 모깔담과 기자 남동쪽 15km 지점의 엘뚜르 등에서 캐내어 이용하였다. 화강암의 경우는 카이로 남쪽 850km 떨어진 아스완에서 나일강을 통하여 운반 해 왔다. 돌을 쌓은 단층의 수는 원래 210계단 이었으며, 현재 남아있는 것은 203계단이다. 하루 10만여명이 1년에 3,4 개월씩 20여년(총 2천여일) 동안, 연인원 2~3억명이 동원된 대규모 공사로서 용도는 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밑변의 길이 230.3m, 겉표면에 있었던 돌의 17만여개는 아랍과 터키 점령하에서 건축자재로 재활용 되느라 벗겨 졌다. 피라미드의 가장 경이로운 점은 아마도 그 거대한 구조물의 방향일 것이다. 각 변이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 그 각도의 오차는 진북(眞北)에서 5분 밖에 벗어나 있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도 미미한 것이어서, 우연의 배열의 결과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또한 현대 20세기의 건축물로도 따라갈 수 없는 정확성은 도저히 인간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이다. 105 m 높이의 `상승통로`는 완벽한 배열에서 1 cm 도 벗어나지 않았으며, 이 피라미드가 건조될 당시 천구(天球)의 북극에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던 용 자리의 알파 별을 지표로 삼아 이 통로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런 놀라운 배열로 미루어 보아, 피라미드는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해시계이고, 달력이고, 동시에 천문대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원래의 높이는 147 m 지만 이 피라미드는 동지무렵에는 80 m 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봄에는 그 길이가 거의 0으로 줄어든다. 따라서 그림자의 길이를 이용하여 하루의 시간을 재고, 계절을 식별하고, 한해의 정확한 길이를 측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스핑크스] 세세프앙크 살아있는 형사 교살자로 불리는 스핑크스, 폭?의 아버지 스핑크스가 있는 곳에는 장례와 제사를 올리는 장제전이 있었다. 2중벽으로 외벽은 석회암이고 내벽은 화강암으로 다시 쌓았다. 돌을 쌓을 때에도 어긋만남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모서리처리도 하나의 돌로 라운드처리해서 축조하는 방식이라 매우 단단했다. 원래 지붕이 있던 곳은 지붕은 없어지고 그 골격 흔적만 남아있었다. 파라오가 죽으면 시신을 싣고 나일강의 서편으로 와서 이곳에서 미이라작업을 하고 장례를 치르는 장소가 이곳 장제전이다. 석회암은 카이로시 일대에 석회암지대가 많아 여기서 공급을 받았고 화강암은 이집ㅌ에서 2곳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다는 시나이산의 430km (산을 넘고 모래사막을 건너야 하기 때문에 불가능하고) 떨어진 아수원 960km 떨어진 아수원에서 가져온다. 남에서 북에 흐르는 나일강이 1년에 한번씩 범람하는데 이때에 물의 흐름이 빨라지고 깊어지고 넓어지기 때문에 이시기에 아수원에서 뗏목을 이용해 운반했을것이라는 추측을 할 뿐이다. 1천킬로미터를 운반한다는게 간단하지 않다. 성경의 출애굽기에 의하면 이스라엘백성들이 이집트에 살면서 파라오들이 흙벽돌을 만들게 한다. 첫째 곡식창고와 무기창고를 흙벽돌을 이용해서 만들었다. 둘째, 커다랗고 하얀집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파라오의 궁을 만들었다. 흙벽돌을 이용해서 만들었기에 지금은 궁이 남아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승의 순간적인 삶과 저승의 여원한 삶을 생각했기 때문에 신전과 무덤은 돌을 이용해 만들고 궁전은 흙벽돌로 만들었다. 셋재, 신전 등의 돌을 쌓는 작업을 흙벽돌을 이용해서 쌓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한 흔적이 남아있다. 성전을 짓는 장소에서 돌을 다듬은게 아니라 채석장에서 도면대로 돌을 다듬고 그 돌을 옮겨서 그대로 TK기만했던 그러한 방식으로 피라미드와 거대한 신전의 돌들이 축조되었다는 근거들이 있다 돌의 뒷면에 하나하나 숫자들이 새겨져있다. 기원전 3천년전부터 이미 1년을 365일로 12개월 4계절을 구분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집트는 나일강의 범람으로 나일강을 중심으로 그 좌우측에 땅들이 비옥해진 농경지가 생겨 이를 경작해 생활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래서 이집트는 나일강이 밤람하는 날이 새해 첫날이 된다 7월19일에서 23일사이가 된다. 이러한 나일강의 범람은 수천년을 지속해왔다. 하변의 길이가 230m가 되는 피라미드의 기초의 수평을 어떻게 잡았을까하는 문제는 측량이 발달한 지금도 쉽지않은 문제이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은 이미 4천5백년전에 나일강의 물을 이용해 수평을 잡고 원석에서 돌을 떠낼 때 조밀하게 구멍을 파고 그기에 나무를 박고 물을 주면 나무가 물에 팽창하는 힘에 의해 돌이 갈라진다. 스핑크스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사자의 몸체로 알고있지만 실제로 스핑크스는 황소였다. 스핑크스의 얼굴에는 원래 수염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수염은 영국 대영박물관에 가 있다. 몸체가 사막의 모래에 묻혀있었던 것을 지금은 발굴해 놓았다. 그래서 스핑크스의 목에까지 잠겨있었기 때문에 목 부위가 사막의 모래바람으로 많이 훼손되어 있었다. 파피루스껍질을 벗기고 속살을 두드려 펴서 이것을 무거운 것으로 눌러 여러장 겹쳐 종이를 만드는 방식으로 파피루스 종이를 직접 제작하고 피라미드는 고대이집트어로는 메르라고 하고 상승이라는 뜻을 가진다. [올드카이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는 올드카이로는 4세기경에 세워졌다는 마리아교회는 밖에서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집과 별로 다를 바 없었다. 교회는 생각보다 좁고 초라했다. 마당은 폭이 약5m 정도였고 사다트 이집트 정치지도자들과 기독교 지도자들이 함께 찍은 사진들이 진령되어있었고 베드로의 제자인 마가 등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의 사진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이집트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1세기경인데 베드로의 제자인 마가가 기독교를 전파했다. 이교회가 마가가 아기예수 피난교회는 마리아 교회에서 약 100m 떨어진 골목 안에 있었다. 초라하고 조그마한 교회였다. 사다트 이집트의 대통령이 1981년도에 암살당한 광장 중동전쟁의 평화협정을 이끌어낸 공로를 세운 키신저가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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