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숨결 피리대향연
황금빛 들녘 아름답고, 맑고 푸르른 하늘 드높은 가을은 넉넉한 여유와 풍요로움이 있어 좋다. 이 가을, 달빛 흐르는 천년고분에서 듣는 한가락의 구성진 피리소리는 고뇌와 번민이 끊어진 피안의 언덕에 와 있는 듯한 착각에 들게 한다.
지난 18일 저녁 노서리고분군에서는 ‘민족의 숨결 피리대향연’은 약 5백여명의 참석자들을 싣고 피안으로 향하는 한 척의 반야용선이었다. 피리, 단소, 개량단소(북한, 중국 등에서 단소를 개량해 사용), 퉁소 등이 거문고, 가야금, 해금, 장고, 북 등과 어우러진 멋지고 특별한 무대였다. 특히 중국 연변예술대학의 신용춘교수의 퉁소와 연변대학교 장익선교수의 개량단소는 쉽게 들을 수 없는 아주 귀한 연주였다. 그러나 행사의 백미는 역시 대금이었다. 김동진류대금산조를 연주한 스물네명의 대금합주는 장엄하면서도 애절한, 감동 그 자체였으며 피리대향연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피리를 주제로 공연을 열고 피리만이 가진 독특한 소리의 색깔로 가슴마다에 진한 감동을 자아내게 한 주인공은 만파식적보존회 문동옥이사장이다.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에서까지 각 분야에 최고의 기량을 자랑하는 최정상급 국악인들을 초청해 가진 이번 피리대향연은 평생을 대금과 같이해온 그가 아니면 도저히 생각할 수도, 실행할 수도 없는 그 유래가 없는 독특한 축제였다.
“세계적인 피리축제를 열고 싶습니다. 피리축제를 문화상품으로 만들어야합니다.”
“경주가 신라 3현(가야금, 거문고, 향비파) 3죽(대금, 중금, 소금)의 고장이고 만파식적으로 명명되는 대금의 본고장이라는데 주목하고 피리의 본고장 입니다”
신라의 만파식적을 오늘에 재현하고자 혼을 사르는 그는 이러한 피리축제를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피리축제로 발전시켜 전 세계의 모든 피리들을 한자리에 모아 연주하고 그 제작과정을 전시하고 또 직접 제작을 체험하고 이를 상품으로 개발해 판매도 하는 세계유일의 피리축제를 열겠다는 꿈을 가슴에 담고 있다. 피리대향연은 이를 위한 일종의 시험무대였다.
천년의 소리 만파식적을 재현하고 알리고자, 2002년 2월 만파식적보존회를 결성하고 만파식적에 대한 연구와 정기공연을 열어 오고 있다.
만파식적!
그 소리에 적병은 물러가고, 병든 사람은 낫고, 바람을 멈추게 하고, 파도마저 쉬게 했다. 문무왕과 김유신장군이 죽어서도 용왕이 되고 천신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 후손들의 안위와 평안을 위해 내려준 선물, 파란을 없애고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 힘을 지녔던 신비의 피리이다.
댕기머리 소년에서 대금명인으로
문동옥(45 만파식적보존회 이사장, 율맥대금공방 대표).
대금연주의 명인이며 대금제작의 명장이다. 대금산조의 거성 김동진선생의 유일한 제자이며 김동진류대금산조를 CD에 담아 그 맥을 전하고 이어가고 있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전통 관악기인 대금계에서 으뜸가는 보배다.
그는 전라북도 정읍군 고부면 관청리에서 전통적인 유학집안의 6형제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가풍에 따라 댕기머리에 한복을 입고 자란 그는 남들이 학교에 다닐 나이인 일곱 살 때부터 10여년간 정읍서당에서 논어, 맹자, 대학, 중용 등 사서를 공부했다.
그의 대금과의 인연은 1974년 용인민속촌의 개관으로 보발(머리를 길러 보존)한 그의 가족들이 선발되어 민속촌으로 들어가 생활하면서부터다. 어려서부터 대나무나 PVC파이프에 구멍을 뚫어 직접 피리를 만들어 불면서 피리연주를 즐기고 좋아했던 그는 한학을 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관리직을 지망한 데 반해 죽관악기를 제작하는 ‘풍물집’의 기능직을 자원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신병문(60 당시 풍물집 악기장)선생으로부터 대금제작기술을 배웠다. 또한 연주차 들렀던 대금산조의 명인 김동진 선생을 만난다. 선생의 대금소리에 매료되어 집안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당장 선생의 문하생이 된다. 30년에 가까운 그의 대금인생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국악은 기생들이나 사당패들이 하는 걸로 인식되어있던 때라 어른들이 족보에서 지우겠다고 했지만 대금공부를 위해 가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일주일 만에 식구들도 승낙했어요.”
민속촌 입구 마을에 있던 선생의 거처로 들어가 숙식 등 생활일체를 수발하며 대금공부에 들어갔다.
선생의 사사법은 아주 혹독했다. 아침 4시에 산에 올라가 대금공부를 했고 손수 아침을 지어 드리고 민속촌으로 출근해 종일 일하면서 대금을 불었고 저녁에는 12시까지 대금공부에 열중했다. 하루 4시간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대금공부에 몰입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술병을 늘 끼고 생활할 만큼 술을 좋아했던 선생의 성격은 보통이 아니었다. 선생의 명성을 듣고 전국에서 모여든 문하생들이 사흘을 배기지 못했다. 많은 제자보다는 한명의 출충한 제자를 원했던 선생의 교수법 때문에 김동진 선생의 맥을 잇는 제자는 문동옥선생이 유일하다.
“고통을 삼키고 난관을 극복하면서 마음이 젖국이 되어야만 제대로 성음이 된다고 생각하시고 의도적으로 제자들을 혹독하게 채찍질하셨습니다.”
나무하고 군불을 지피는 부목에서, 밥 짓고 빨래하는 식모까지 같이 먹고 자면서 모든 수발을 하면서 하는 대금공부는 그야말로 수련이었다.
선생의 혹독한 당금질을 견딘 그는 76년도 KBS민속백일장에서 년말 장원을 차지하면서 대금실력을 인정받았고 국악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평소 그렇게 혹독하고 괴팍하던 선생님은 이후로 마치 스승을 대하듯 그렇게 관대하게 사랑해 주셨어요.”
당시 각 언론매체에서 10대 국악소년 출현을 대서특필하고 여기저기서 많은 관심을 보였다. 따라서 76년부터는 서울에서 본격적인 연주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던 그가 경주와 인연을 갖게 된 것은 정말 우연한 기회였다.
울산 그랜드호텔의 개관공연에 왔다가 경주에 들렀을 때 시립국악원에서 많은 국악인들을 만나 권유도 받았고 또 경주의 깨끗하고 조용한 도시환경에 마음이 끌려 경주에 머물게 되었다.
대금보급에 힘쓰는 지도자
그의 인생은 오직 대금을 연주하고 만드는 일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때 건강이 따라주지 않아 아쟁을 연주하기도 했다. 79년에 간염으로 대금을 계속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97년에는 간경화로 입원, 이후 3년간 술, 담배를 끊고 투병생활을 한 끝에 어느 정도 회복되었지만 대금연주는 무리였다. 지금도 3개월에 한번씩은 검진을 받아야한다. 그러나 95년 김동진 선생의 갑작스런 작고로 선생의 독특한 산조가락을 정리하고 그 맥을 이을 소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느끼고 다시 대금을 시작한다.
“내가 크지 않고는 선생님의 맥을 이을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명인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는 96년에 김동진류 대금산조 CD를 제작하여 발표한다. 그리고 99년 전국전통예술경연대회에서 영예의 대통령상을 받아 그야말로 대금연주의 명인이 되고 최정상임을 대외적으로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그의 명성은 국악계에 드높아지고 전국대회 심사요청이 잇따르고 대학강의 섭외도 많이 들어왔다. 지금도 부산대, 영남대, 동국대, 포항예고 등에 출강하면서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다.
“지금은 몸이 좋지 않아 연주활동은 하지 않고 지도만 하고 있어요.”
그는 주로 전공자들을 지도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제자들이 서울대, 한양대, 영남대, 부산대, 동국대 등 국악의 명문대학에 진학하여 공부하고 있음이 자랑스럽다.
올해에도 제자들이 각종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동아콩쿠르 은상, 한양대 대회 은상, 부산전국대회 종합대상, 부산 1인1기 대상, 창원국악 대상, 신라국악대전 최우수상 등 여러명의 제자들이 각종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그는 지금도 만파식적보존회와 율맥국악연구소(성건동 월성초등학교 서편)를 운영하면서 대금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다. 최근에는 대금의 보급을 위해 대금상설무료강습을 열고 있다.
죽관악기 기능전승자
그는 우리나라에서 아니 지구촌에서 가장 질 좋고 많은 대금을 만드는 율맥대금공방(배동 경주교도소 옆)을 운영하고 있는 죽관악기 기능전승자다.
연주자가 악기를 제작하는 경우는 흔치않다. 그러나 그는 대금제작의 명장이다.
민속촌에서 나온 뒤 다시 대금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어려운 살림살이 탓도 있었지만 마음에 드는 대금을 구하기가 어려워서였다.
“대금들이 제대로 된 게 없었어요. 반만 만들어 놓으니까. 다시 손을 봐야했어요. 그래서 아예 내가 만들기 시작했어요.”
연주자가 직접 악기를 만들기 때문에 그만큼 음이 정확하고 정교했다. 따라서 전국에서 주문이 쇄도했고 특히 대금을 잘 부는 사람들의 주문이 줄을 이었다.
대금은 최소 3년이상 자란 쌍골죽(골이 양쪽으로 패인 일종의 기형 대나무)으로 만든다. 쌍골죽은 일반대나무에 비해 쌀집이 두껍다. 그래서 대금의 깊고 깊은 소리가 만들어진다.
쌍골죽은 자연대나무이기 때문에 굵기와 두께, 형태가 천차만별이다. 똑 같은 제품이 있을 수 없고 대나무마다 그 특성에 따라 마디를 자르고 구멍을 파고 음을 골라야 한다. 이 작업들의 대부분을 그가 수작업으로 손수 만든다.
한낱 기형대나무에 불과한 쌍골죽이 그를 만나면 신비한 명기로 다시 태어난다. 혼을 흔들어놓고 심금을 울리는 대금이 되고 파도를 쉬게 하는 만파식적이 되고 세상의 파란을 없애는 만만파파식적이 된다.
그의 가족은 경주시립국악원 강사시절 전통무용 연수생이었던 그의 아내 황보남(43 전통무용)선생과 그의 맥을 이어 대금을 전공하는 아들 문현수(20 한양대 국악과 입학)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