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은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지구촌을 이루어 왕래하고 있고 다들 글로벌이니 해서 다투다시피 해외로 진출하고 있다. 교육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해외 유학생 수가 2008년 21만6867명이던 것이 2018년 22만0930명으로 점진적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자료:교육부) 조기유학이라 할 수 있는 초등학생의 경우 2019년 1만2432명(유학 4693명, 파견동행 5738명, 해외이주 2001명)으로 중학생 4463명, 고등학생 1857명에 비교해 볼 때 월등하게 높은 수치이다.(자료:해당국 재외공관에서 관할국가 한국인 유학생 조사) 여기서 미국으로 유학한 초등학생을 보면 2006년 한 해 3,000명을 넘어 서는 기록을 세운 이후 점차 줄어드는 추세이지만 2018년 600여명에 이르고 있다. “10년 안에 과거급제 못하면 어디 가서 내 아들이라고 하지도 마라. 나도 아들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겠다” 경주 땅에서 출발하여 걷고 배를 타고 또 걸어서 3개월여나 하여야 다다를 수 있는 국제도시 중국(당 唐) 장안(長安)에, 그것도 초등학교 5학년에 해당하는 12세의 어린 아이를 두고 아버지(최견일)가 한 말이다. 1150여년 전인 868년(경문왕 8) 최치원(崔致遠 857-?)은 이렇게 중국으로 조기유학을 떠났다. 최치원은 이 약속을 저버리지 않고 당 유학 6년만인 874년 9월, 18세의 나이에 예부시랑(禮部侍郞) 배찬(裵瓚)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중국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실시한 과거)에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당시 신라에는 과거제도가 없었고 골품제도로 인해 신분 제약을 많이 받던 육두품 출신들이 많이 응시하였던 것을 보면 이러한 시대상이 유학의 동기에 영향을 끼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837년(희강왕 2)에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던 신라 학생수는 216명에 달하여 외국인 가운데 가장 많았다. 840년에는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학생수가 105명이나 되었으니 유학 열풍이 거셌던 셈이다. 821년 신라 유학생 김운경(金雲卿)이 처음으로 당의 과거에 급제한 후 당이 멸망하는 907년까지 과거에 급제한 학생은 58명이었다.(자료:동문선) 신라를 통틀어 당나라에 유학한 학생 가운데 가장 뛰어났던 인물은 바로 고운(孤雲) 선생인 것이다. 고운은 약관의 나이에 선주 율수(凓水, 강소성 남경) 현위를 제수 받았다. 이후 그는 양주(陽州)의 당성(唐城)을 막부로 쓰고 있던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병(高騈 ?-887)의 밑에서 관역순관(館驛巡官)이라는 비교적 높은 종사관으로 근무했다. 이때 고운은 881년에는 황소의 난을 진압하는 ‘격황소서(檄黃巢書)’를 써서 일약 스타가 된다. 이를 계기로 당 희종(僖宗) 황제로부터 정오품이상에게 하사하는 자금어대를 받고 양주 목사에 임명되었다. 지금 양주에 최치원 기념관이 자리하게 된 연원이다. 이당시 중국 유학기간은 보통 10년이었으나 고운은 17년 만에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885년 신라로 돌아와 헌강왕에게 발탁되어 시독(侍讀) 겸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왕의 최측근에서 외교문서 등의 작성을 담당하였다. 그 뒤 스스로 청하여 태산군(太山郡, 전북 정읍시), 천령군(天嶺郡, 경남 함양군), 부성군(富城郡, 충남 서산시) 등 외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했으나 신라사회는 중앙귀족들의 권력쟁탈 등으로 극심한 혼란에 접어든 시기였다. 고운은 국제적 안목을 가진 수재였으나 제도의 한계와 사회의 모순 등 시대를 잘못만나 뜻을 제대로 펴 보지 못한 채 전국 방랑길에 오르게 되니 그의 나이 41세(898년)였다. 지난 2015년 경주시에서 (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에 의뢰한 보고서 󰡔중국에서 활약한 신라인의 문화관광자원화󰡕에 따르면 고운은 전국 각처의 89개소에 관련 유적을 남겼으며, 영정을 봉안한 곳도 21개소에 이른다. 또 주거주지가 17개소, 친필 서각으로 알려진 것이 13개소이다. 또 향교나 서원에 배향된 곳은 얼마나 많은가. 유적이 있는 시·군 지역을 보면 경북 9개, 경남이 10개, 전북 5개, 충청 4개, 경기 2개,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전남 등 전국 지자체에 고운의 발자취가 서려 있다. 아마 전국적으로 이만한 족적을 남긴 인물은 없었던 것이다. 중국에서도 회남(淮南, 현 양주)을 비롯한 7개 도시에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지난 3월 경주에서 ‘고운 최치원 인문학적 가치 학술대회’가 의미 깊게 열렸다. 이미 1997년부터 각처에서 40회나 고운을 두고 학술대회가 열린 것을 보면 그의 치적이 대단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운을 주제로 한 석박사만도 10여명에 이른다. 고향 경주에는 8개소의 유적을 비롯하여 주생활지역 4개소, 영정 1, 서원 배향이 1개소가 있다. 이제는 유불선을 아우른 고운 선생의 고향에서 그를 기억하고 추억할 수 있는 자원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으면 한다. 어린 나이에 말도 통하지 않던 당나라에 유학한 최치원은 그의 자호 고운(孤雲)처럼 고향을 그리워하던 ‘외로운 구름’이었는지 모른다. 신라에 돌아와서도 혼란한 나라를 바로 세워보겠다는 뜻을 펴지 못한 채 방랑하던 ‘외로운 구름’이었는지 모른다. 천 백년이 지난 지금도 고향에서 선양에 목말라 구천을 떠도는 ‘외로운 구름’인지도 모른다. “경주여! 고운(孤雲)님을 잊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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