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두꽃
고영민
늙은 어머니목련나무 가지에 앉아만두를 빚네빚은 만두를 한 손 한 손나뭇가지에 얹네크고 탐스러운 만두는한입에 다 먹을 수 없네볼이 터져라나는 만두를 욱여넣네세상 모든 목련나무의 만두는늙은 내 어머니가 빚어놓았으니목련나무마다잘 쪄낸 만두꽃이 피었네어머니, 이제 그만내려오세요어머니 나무 그늘 밑으로툭, 떨어지네
-목련에서 늙은 어머니가 쪄낸 만두를 보다
조상들의 식물 이름 명명법을 보면 눈물겨운 데가 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봄날에 핀 꽃들을 이팝(이팝나무), 조팝(조팝나무), 국수(국수나물)라 불렀을까? 근래에 한 시인도 “돌나물을 무쳐먹던 늦은 저녁밥때에는/한사발 하얀 고봉밥으로 환한 목련나무에게 가고 싶었다”(문태준, 「하늘궁전」) 고 말할 정도로 춘궁기의 모든 생물은 근원적인 식욕을 유발하나 보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 시에서 목련나무에서 “잘 쪄낸 만두꽃”, 평생을 “빚은 만두를 나뭇가지에 얹”는 “늙은 어머니”의 손길을 만난다. 확실히 목련은 오므린 자태가 만두의 형상을 닮았다. 세상의 어머니는 식구들의 입에 더운 밥과 먹을 것 들어가는 것을 낙으로 사는 분이시다. 농본주의적 삶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대자연도 마찬가지다. 늘 이맘때가 되면 우리들 정신적 허기를 달래줄 한 그릇의 밥과 “크고 탐스러운 만두”를 두 손 모아 건네준다. 그러면 우리는 “볼이 터져라” 대지의 그 밥을 “욱여넣”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꽃들은 개인적이면서 대지모신적인 의미를 지녔다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시인의 형이 서른셋에 사고로 세상을 떴을 때 시인의 어머니는 2년이 넘게 “매일 아들이 지냈던 방에 불을 밝혀놓았”고, “아버지가 병에 걸려 몸져누웠을 때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끼 새 밥을 지어 올렸다”고 한다. 그 마음이 목련나무를 보는 시인에게 옮겨붙었으리라. “세상 모든 목련나무의 만두는/늙은 내 어머니가 빚어놓았으니”라는 말도 과장이 아니다. 그러나 대지의 신은 영속하지만 현실의 어머니는 유한한 삶을 사신다. “이제 그만/내려오세요”라는 아들의 글썽이는 말에 “어머니 나무 그늘 밑으로/툭, 떨어”지실 수밖에 없다. 자식은 이제 어머니를 가슴에 묻고 남은 생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해마다 어머니의 둥글고 자애로운 사랑은 또 피어나고 지기를 반복하고, 시인은 또 “늙은 내 어머니가 빚어놓은” “한입에 다 먹을 수 없는” 만두을 울컥이며 먹을 것이다.
“활짝 핀 목련꽃을 표현하고 싶어/온종일 목련나무 밑을 서성였”지만 “봄에 면해 있는 목련꽃을 다 표현할 수 없”(고영민, 「목련에 기대어」)었다는 시인이 마침내 어머니 돌아가시고 얻은 「만두꽃」은 어머니라는 근원을 대지모신과 결합시켜 빚어낸 가편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