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귀하던 시절, 사진의 불모지였던 경주라는 척박한 터전에서 1940년 사진계에 입성한 최원오 선생(崔元伍, 1917~1999)은 지역의 사진문화예술을 이끈 선각자였다. 시대를 앞서간 사진가였다. 생활도 영위해야 하는 상황에서의 그의 작가활동은 그래서 더욱 눈에 띈다. ‘누군가의 삶이 누군가에겐 풍경이 된다’고 했던가. 선생의 작품들에게선 사람 냄새 진한 생활 속 삶이 펄럭거린다. 일상을 기록하는 일기처럼 당시 경주 사람들의 일상을 잔잔하고도 담박하게 읽히도록 한다. 사진들 속 인물들에 손을 내밀면 마치 친근한 미소가 잡힐 듯 선연하게 다가온다. 사람뿐만 아니라 문화유적, 식물이나 동물, 무심한 논과 밭을 세밀하게 때론, 투박하고 정겹게 혹은 실험적으로 담아냈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흉내 내기 어려운 카메라아이(camera-eye)는 부럽기만 하다.
경주에서 사라졌거나 대부분의 경주 풍광은 이미 변화된 지 오래다. 풍습과 사람과 사물들 중 아직은 남아있지만 곧 사라질 것들이 눈에 자주 띤다. 그래서 선생의 작품은 그런 우리들을 쉬어가게 하고 쉽게 변절시키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해 숙고하게 한다. 선생의 여러 유고와 작품집을 손으로 직접 만져보고 넘겨보면서 아직도 그 열정이 고스란히 손에 전해졌다. 선생이 얼마나 사진을 사랑했는지, 남겨진 작품을 우리가 어떻게 알리고 선양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이 깊어졌다. 이 기사를 바탕으로 향후 경주에 대한 사진 기록을 더욱 궁구하고 아카이빙(archiving)하는 작은 단초가 되기를 바라본다.
-‘작품사진과 기록사진은 구별돼야 하는데 대중이 잘 구별하지 못하니 작품 사진의 위상이 분별성이 없다’ 최원오 선생의 아드님인 최용대 화백의 작업실에는 선생이 남긴 사진작품들과 자료를 정리해 놓은 스크랩 북, 축하전보, 전시도록, 작품선집, 약력서, 전시방명록, 수많은 필름들(일명 ‘원고’)이 쌓여 있었다. 선생의 스크랩북에는 당시 위촉장, 사진계의 동향 기사, 각 수상작, 사진응모요강, 촬영대회 공모, 전국촬영대회 작품전, 전국사진관련 기사, 국내는 물론, 해외의 각종 사진콘테스트 마감일 등을 꼼꼼하게 메모해 두었다.
노트 한 켠에는 ‘농도 짙은 부분에 붉은 색이 끼거나 농도 엷은 부분에 녹색이 낀 경우는 E3에 처리해야 할 필름을 E4로 처리한 경우다. 엷은 노랑은 베이스면으로 촬영했거나 베이스면을 통해 광선을 받았을 경우다. 붉은색은 필름이 붉은 안전등 광선을 받았음, 반전처리에서 발색현상으로 옮기는 시간이 너무 걸렸다...,’ 등 사진 촬영과 현상에 대한 시행착오를 상세하게 적어두었다. 이런 면모에서 ‘신은 디테일에 있다’라는 말이 생각났다.
“영업은 생계수단으로 삼고 정작 목적은 작품에 있었습니다. 저도 화가라 당신께서 ‘작품하는 입장에서 너는 좋겠다. 그림은 아무나 못 그리잖아. 사진은 뭔지도 모르고 카메라 들고 찍으면 되니까. 작품사진과 기록사진은 구별돼야 하는데 대중이 잘 구별하지 못하니 작품 사진의 위상이 분별성이 없다’고 제게 토로하곤 하셨지요.
-“관리가 소홀한 듯해서 세상에 내보이기가 편치 않습니다. 자식으로서 당연히 부친의 업적을 선양해야 하는데 묵혀두고 있으니까요” “말년에는 서울의 ‘라이브러리(당시 각종 장르별 필요한 사진들을 구입하거나 대여해서 각 출판사로 빌려주는 업체로 최용대 화백은 이곳을 이렇게 불렀다)’에 원고(필름 자체)를 보내면 그 라이브러리는 이에 대해 수수료를 떼는 방식이었으니 다달이 그 대여료(일종의 저작권료에 해당)를 받아 용돈으로 쓰셨어요. 순수 작품도 내셨지만 용돈벌이로 원고를 보내신 듯합니다. 원고는 수 천 장 있었습니다. 치매로 작고하실 때, 원고를 송고할 당시의 목록과 회사명, 자료가 있었으나 디지털 사진으로 전환되던 시기여서 그들 회사들이 부도가 나버린 뒤였습니다. 라이브러리에 보낸 양이 어마어마한 것이어서 백방으로 원고를 찾을 방법을 알아보았으나 소용 없었습니다”
그나마 일부 소장하던 원고들은 커다란 박스 세 곳에 담겨 남아있을 뿐이지만 이 또한 엄청난 자료들로 원석 그 자체였다.
“서울 ‘라이브러리’로 간 것이 이 분량의 수 십 배였어요”
얼마나 많은 작품들을 잃어버렸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필름마다에는 꽃, 누드, 문화재, 나락·보리, 인물, 식물, 파초, 스포츠, 농촌, 의학, 지석묘, 대나무, 지리산, 바다, 갈대 등의 이름으로 네임카드를 붙여 세밀하게 분류 해두었다. 카메라 필름 크기에 따라 소형필름, 중형 필름, 대형필름 별로 마운트(mount, 슬라이드용 필름을 끼우는 틀)가 보관돼 있었다.
“제가 중학교 시절(1960년 후반 경)에 찍으셨던 문화유산 사진은 많이 남아있습니다. 원고 캐비닛에 보관돼 있지요. 슬라이드 필름은 ‘마운트’라고 해서 명패를 달고 번호를 매겨 어떤 사진인지를 구별해 놓았습니다. 마운트로 일련번호를 매겨 찾기 쉽도록 정리해 두셨는데 치매를 앓던 말년에 당신이 정리해놓았던 것을 마구 뒤섞어버려서 지금은 혼재돼있는 상태입니다”
“관리가 소홀한 듯해서 세상에 내보이기가 편치 않습니다. 순수 작품 활동도 하셨지만 경주와 전국의 문화재 사진도 많이 찍으셨습니다. 제가 서양화가랍시고 경주미술사 연구에만 매진하다보니 바로 제 선친임에도 아카이브 관리나 여타 활용을 하지 못하고 있어서 부끄럽고 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또 수많은 필름을 되찾지 못하고 그 시기마저 놓쳐버린 듯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지요. 자식으로서 당연히 부친의 업적을 선양해야 하는데 묵혀두고 있으니까요”
-“대형 사진을 인화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어서 부친께서 그 기계를 직접 만드셨습니다” 선생은 1970년 은다실에서 김지원의 시와 함께 시사전(詩寫展)도 가진다. 사진전시만 한 것이 아니라 시라는 장르와 나란히 사진을 보여준 것은 당시 신선한 기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관을 운영하면서 공모전이나 국제싸롱전에 여러번 출품했던 선생은 국전 초대작가를 필두로 사협지부장도 여러번 맡아 제자들이 유독 많았다. 일반적인 동우회 활동도 많았으니 지금의 어떤 사진작가에도 뒤지지 않을만큼 열정적으로 사진을 찍었다.
한국현대사진대표작선집에는 선생의 ‘밭오랑(1982, 당시 표기 그대로임)’이라는 작품과 ‘수술대(1978)’, ‘인생’이라는 작품이 실려 있다. “이 중 ‘인생(제1회 국전 입선작, 1970)’을 연출하실 때 당신의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해서 가장 만만한 대상이 가족이니까 제 동생과 이웃 할머니를 모델로 연출하셨었어요. 하하. 제가 모델 된 적도 더러 있었어요. 주변의 동네사람들도 모델로 활용하셨죠. 다 작품을 연출하기 위해서였죠”
한편, 선생이 말년에 찍었던 석굴암 11면 보살 사진들은 품위가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 주문해 사가곤 했다고 한다.
“주로 사이즈를 크게 확대해서 인화했어요. 당시엔 그런 대형 사진을 인화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어서 부친께서 그 기계를 직접 만드셨습니다. 함석집에 가서 렌즈는 독일산을 붙이고 주름상자로 거리 계산을 해 확대기를 만들었지요. 인화기 자체를 함석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인화하는 기법에서는 각 부분을 머릿속에 입력해서 그 계산을 통해 빛을 가려서 광이 아주 고른 사진을 만들었습니다. 컴퓨터 같이 정확히 사진을 뽑아내셨지요. 제자들이 ‘선생님 그 기술 좀 가르쳐달라’고 하면 ‘내 머리 떼어가라’고 하셨죠. 하하”
“그리고 ‘바뜨’라는 인화약을 담은 나무통(나무로 짠 큰 통에 비닐로 물이 새지 않도록 함)은 폭이 좁으니까 골고루 약품이 묻도록 인화하는 작업은 무척 힘든 과정이었습니다. 본존불이나 보살상을 세로로 길게 뽑아내셨거든요. 아버지는 기존의 카메라도 개조해서 사용하기도 하셨습니다”
“어버님이 말년에 찍으신 작품들은 대체로 단순하고 공허한 분위기가 많아 봬요. 그리고 말년에는 거의 연출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최원오표’ 카메라 지금까지 전수돼 문화유산사진 찍는 굴지의 작업 계속된다 선생이 남긴 장비 중 ‘린호프’라는 명기를 전수받아 지금도 현장에서 활용해 그 정신을 이어받고 있는 미담이 전해지고 있다. 바로 경주가 자랑하는 문화유산전문사진작가 오세윤 사진가와의 스토리다.
최용대 화백은 “저희야 선친을 기억하는 의미로 남겨두는 것도 좋지만 좋은 사진을 찍는 훌륭한 작가가 카메라를 활용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서 오세윤 작가에게 건넸습니다”라고 했다.
오세윤 사진가는 “선생께서 사진관에서 영업용으로 사진을 찍으려 했다면 제게 준 카메라보다는 사진관에 맞는 카메라로 일반적인 사진을 찍어서 돈을 버는 것이 우선이셨겠죠. 제게 준 카메라는 필드형으로 야외 실사에 최적화된 카메라였습니다. 제가 받은 카메라는 명기로 대를 이어 물려 줄 수 있는 카메라입니다. 그런 귀한 카메라를 최용대 화백께서 선뜻 제게 주셔서 너무 감사했죠. 카메라가 없어서 사진 작업을 하지 못할 때였거든요. 사고 싶어도 살 수 없었던 시기였죠. 근데 흔쾌히 주셨거든요. 도구를 이어받는다는 것은 장인들에겐 그 정신을 이어받는 것이어서 더욱 어깨가 무거워집니다. 약간의 사례를 하긴 했지만 ‘사진을 찍다가 더는 못찍을때가 오면 돌려 드릴 것’이라 하고 받아왔습니다”
오 작가는 그 카메라로 역대급 문화재 사진들을 찍고 있다. 그 카메라로 찍은 굵직굵직한 사진들이 많은 것이다. ‘신라의 금동불’, ‘경주 남산’, ‘신라 기와’ 등이 그 작업물들이다. 지금도 대표적으로 국립경주박물관 메인 도록에 등장하는 사진들이 ‘최원오표’ 카메라로 찍은 작품들이다. 작가 정신을 잇게 해 준 최용대 화백이나 그 정신을 이어받아 굴지의 작업을 해내고 있는 오 작가 모두가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최원오 선생은 시대를 앞서 간 작가였습니다” “구성적인 미학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작품들로 지금 봐도 매우 세련됐어요” “많은 이들이 감상할 수 있는 선생의 사진전이라도 마련되는 계기가 됐으면” 오세윤 사진가는 “최원오 선생은 시대를 앞서 간 작가였습니다. 지금 경주에서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들이라면 꼭 배워야 할 분입니다. 애정을 가지고 찍으셨고 고민을 하고 찍은 사진들이었습니다. 사진에 대해 철저한 작가 정신을 가지고 찍은 작품들이지요. 처음으로 경주에서 사진작가로서 개인전을 가진 분이고 분명한 자신만의 컬러로 사진을 찍은 분이셨습니다. 서라벌문화회관서 전시할 때 ‘시바크롬’이라는 인화지가 엄청난 고가였는데도 감수하고 개인전을 감행하실 정도로 사진에 대한 애정이 뛰어나셨습니다. 경주에서 조명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입니다”라고 말했다.
또 현곡면 금장리에 사는 김선미 씨는 “당시 사진 1세대인 시절에 사진을 찍고 기록하는 것이 참 힘들었을 것 같아요. 어떤 기준이나 표본이 없었을테니까요. 특히 경주는 사진의 불모지 같은 곳이었을 거고 외길 인생을 걸어오신 듯해요. 평생 사진에 매진했다는 것에 존경을 표합니다. 지금 봐도 이렇게 멋진 사진이 남아있다는 것에 감탄하고 있어요. 가이드라인이 없었던 시기에 창의적이고 현대적이었던 것은 놀라워요. 전시를 한다면 제가 가장 먼저 달려가 보고 싶을 정도입니다”라고 했다.
한편, 감포읍에 거주하는 최선호 사진가는 “놀랍습니다”라면서 “요즘은 정말 보기 힘든 사진들입니다. 작품 구성에 깊이가 있으며 사료적으로는 물론, 미학적 구성의 사진언어에서 관록이 묻어나는 깊이가 느껴집니다. 감각있는 수작들입니다. 현대적 감각을 지향한 것으로, 지금 봐도 매우 세련됐어요. 순수 미술적인 측면에서도 구성적인 미학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작품들입니다. 그 중에서 여백미가 있는 작품들은 압권입니다. 최근의 작가들도 동양적인 여백 즉, 미니멀한 구성을 다루려는 시도를 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작가의 눈에 닿는 모든 것들, 즉 사소한 대상이라도 그것을 작품의 소재로 발견해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대상을 바라보는 중요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 분입니다. 잊혀지기엔 정말 안타까운 작품들인 것 같습니다. 오늘날, 누군가 기록하는 현재도 훗날에는 모두 과거의 기록이 됩니다. 선생의 작품이 부활해서 오늘의 경주인에게 새로운 기억과 추억을 선사하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