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사진으로 경주의 근대 끝자락과 현대를 복원하는 일은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인가. 더구나 경주에서 1세대 사진가로 살았던 최원오(崔元伍, 1917~1999) 선생의 작품들이라면. ‘경주문화(제25호)’에 실린 ‘낚시하는 사람’은 이미 경주에 널리 알려진 사진이다. 그러나 그 작품이 경주의 1세대 사진작가 최원오 선생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최원오 선생은 자신의 삶을 구축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수단으로 ‘사진’을 선택했지만 많은 이들과 교감하면서 울림이 되어 숱한 작품으로 우리에게 전설로 남아있다.
선생은 1917년 경주에서 태어나 ‘별천지사진관’을 운영하면서 일생을 사진 작업과 지역사회 문화발전에 기여했다. 일찍이 공보부가 주관한 신인예술상 경연을 비롯해 당대 최고의 무대였던 동아사진콘테스트에 입상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으며 1962년에는 경주사진작가협회의 모태가 된 경주포토클럽(KPC)을 창립해 초대회장으로 활동하는 등 그의 생전 업적은 나열하기 쉽지 않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따뜻한 인간미로 지켜보며, 문화유적과 문화재가 산재한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흘렸을 땀의 결실이었다.
선생은 때로 미쟝센을 통해 작품의 완성도를 꾀하고 이웃과 가족을 대상으로 연출하기도 했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사진으로 남기는가하면, 모두가 향유해야 할 경주의 문화재를 기록해두었다. 그래서 경주의 지난 일상과 사람들은 사진 속에서 영원히 존재한다. 선생이 마주쳤던 그때의 경주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선생의 렌즈 속으로 들어가 본다면 사진 속 수많은 눈빛과 기억들이, 당시의 많은 문화유산이 되살아나 빛을 발할 것이다. 그래서 사진으로 일컬어지는 ‘기록’의 힘은 대단하다. 선생은 자유로운 눈으로 경주의 곳곳을 담아내고자 했고 개인전과 동인전을 당시 ‘다방’에서 열었다.
선생의 아드님인 최용대 화백의 내남면 집을 찾아 인터뷰 하는 내내 마치 광산에서 귀한 보석을 발견하는 희열이 느껴졌다. 차곡차곡 귀하게 보관되고 있던 사진과 도록, 필름들은 그 양이 엄청났다. 부친을 회고하는 최 화백의 기억과 함께 흥미진진한 경주의 현대 풍경을 소환해냈던, 그래서 소중한 시간이었다. 선생의 사진들로 많은 시민이 지나왔던 경주의 시간과 공간에 대해 공유하게 되는 계기를 허락해 준 최용대 화백에게 감사드린다.
본 기사는 2회에 걸쳐 연재되며, 한평생 1세대 사진가로서의 삶과 뛰어난 선생의 작품에 대해 조명하고 선생의 작품들을 아카이빙(archiving)하고 널리 알릴 수 있는 방안에 대해 고민하려 한다.
-위험 무릅쓸 정도로 사진에 대한 열정 뜨거워 숱한 에피소드 남겨 선생은 좋은 사진을 남기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 정도로 사진에 대한 열정이 뜨거워 숱한 에피소드를 남겼다. 그 유명한 일화로, 나원사지의 나원백탑을 촬영하러 갔다가 동네에 수소문을 해도 탑을 찾지 못했다. 결국 돌아가는 기차에 올랐다가 기차가 출발하는 순간 뒤늦게 그 백탑이 눈에 띄어 달리는 기차에서 갑자기 뛰어내렸다는 것이다.
“그 일로 크게 다리를 다치게 되셨고 이후 관절염으로 거의 2년을 앓으셨어요. 지팡이를 짚고 다니실 정도였죠. 말년에는 다시 급성으로 재발해 퉁퉁 부어서 주사기로 화농을 빼내기도 하셨죠”
“설경 사진을 찍으로 가셨다가는 안압지 부근에서 차 사고가 나 또 고생하셨어요. 하여간 작품에 대한 열정이 엄청나셨지요” 최용대 화백의 회고다.
“그러실 정도로 사진에만 몰두한 분이셨죠. 초창기 순수 작품을 찍던 시기에서 나아가, 잡다한 모든 대상을 엄청나게 찍으셨고 문화재 사진도 확장시켜 전국의 문화유적을 다니면서 촬영하셨죠”
최원오 선생은 특히 경주와 신라에 관련된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는 ‘낚시하는 사람’과 신라문화제가 열릴 때 벌떼처럼 봉황대 위에 올라가 구경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찍어 일본 아사히신문 공모전에 당선된 작품 ‘군상’ 이 유명하다. 그 시절의 생활상은 물론 문화재와 유적의 배경이 지금과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들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경주는 지금처럼 번잡하지 않고 고도의 풍미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장면이 많았다. 1998년 사진영상의 해를 맞아 개최된 한국역사사진전에서는 ‘향토에 묻혀 산 사진가들 9인’에 소개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99년 세상을 떠났을 때는 막상 영정사진으로 쓸 만한 본인의 사진이 마땅찮아 애를 먹었다고 한다.
-‘별천지사진관’운영하며 평생 사진 찍어 선생이 남긴 ‘사진 분과 약력서’에는 선생의 경력이 자필로 빼곡하게 기록돼 있었다. 직접 쓴 글씨는 정확한 성품이 그대로 배어나올 정도로 반듯하고 정성스런 필체였다.
약력서에서 최대한 당시의 기록 그대로를 옮기고 최용대 화백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선생에 대한 이력과 수상내역을 소략해 보았다.
선생은 경주 노동동에서 태어났다. 1932년 건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일본의 대판(大阪)기계기술학교를 수료했다. 사진에 데뷔한 연도는 ‘1940년’이라 적혀있다. 지향하는 사진 경향란에는 ‘새로운 현상 외 현대감각’이라고 썼다. 사진 데뷔는 중형(仲兄)이 운영하던 사진관의 견습생으로 들어가 배우고 경주로 와서는 중형이 하던 일을 물려받아 사진작업을 하게 된다.
“선친의 첫 사진관은 봉황대 북편 청기와 사거리 부근이었습니다. ‘별천지사진관’을 맡아 영업을 하셨지요. 두 번째 사진관은 지금의 대왕극장 부근 노동동 89번지의 사진관이었습니다. 이 집은 원래 수월 김만술 조각가 선생의 아뜰리에였고요. 어릴 때 제 기억으로는 사진관 주변이 비포장이었고 동네사람들이 평상을 펴 놓았었어요. 당시도 지금의 신한은행 주변의 ‘다보사진관’ 등 사진관이 매우 잘 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사진관에서 40여 년간 사진을 찍었던 선생은 아들인 최 화백의 권유로 사진관 문을 닫는다.
“이후로는 자유롭게 사진 찍으러 다니시고 제자들 출사에 동행하는 것을 큰 낙으로 삼으셨지요” 선생은 치매를 2~3년 앓다가 향년 82세로 영면에 들었다.
-1966년 일본조일국제싸롱부에 ‘군중’으로 당당히 입선하고 1974년 ‘신라의 석불’ 사진집 출판하기도
선생의 사진가로서 경력은 매우 화려하다. 1963년 사협경북지부에서 공로상을, 1979년엔 사진작가협회에서 사진문화상을, 1982년 예총경주지부에서 사진문화상으로 공로상을 받았다.
1961년 제6회 매일신문 어린이 사진공모전에서 입선(이외에도 매일신문 주최 공모에서 다수 수상), 1962년 문공부 신인예술상 입선, 1963년 신인예술제공모전에서 입선해 수차례 문공부 장관상을 수상하고 동년 동아일보주최 동아사진콘테스트에서 입선, 1963년 신라문화제사진촬영대회서 금상(이외도 신라문화제 수상 다수), 1965년 교통부관광사진콘테스트에서 특선, 1966년 일본조일국제싸롱부에 ‘군중’으로 당당히 입선해 국제사진싸롱당선 축하회(경주예총지부주관)를 열었다.
“당시 국제싸롱공모전에 입선 했을때는 경주 시내가 떠들썩 했을 정도였습니다. 축하연도 열렸으니까요”
1969년 제1회 한미친선촬영대회 추진위원, 1971년 제1회 국전(건축사진)부문에 ‘인생’으로 입선한다. 1974년 ‘신라의 석불’ 사진집(일본아사히신문사 발행)을 출판했으며 1974년 제1회 경북도전초대작가선정, 1974년 제1회 경주예총지부 창립준비위원으로, 1975년 매일신문 지상 초대작품 수록, 1981년 미술연람에 다수 작품을 수록, 1981년 부산일보에 사진 작품집 초대수록, 1983년 한국현대사진대표작선집에 4점을 수록하는 등 그 진가를 인정받았다. 1984년~85년 포항MBC사진 촬영대회 심사위원, 1982년 경주예총공로상 수상, 1985년 제4회 대한민국사진전람회 초대 출품다수, 1989년 ‘최원오 자연사진전(서울 후지포토싸롱)’, 1990년 신라미술대상전 사진부 심사위원, 1990년 신라문화제 전국사진공모전 심사위원장을 지낸다.
선생은 한국사진가협회 경주지부장, 한국사진작가협회 경북지부고문, 대한민국 사진전람회 초대작가, 별천지 사진연구소 운영, 매일 사진동우회회장, 마농사진동우회 지도고문, 한국사진가협회 경북지부 창립회원 등을 역임하며 지역 사진계의 리더로 활약했다. 또한 위 소략적 정리로 보아 당시 1960~70년대에 사진과 관련한 각종 공모전과 사진대회가 전국적으로 막 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개인전 3회, 동인전 1회 하며 김만술 조각가, 손일봉 선생, 김준식 선생 등 1세대 예술가들과 교류// 당시 사진작가로서 위상은 독보적 1963년 제1회 최원오 사진전을 경주 호 다방에서 열었다. 이어 1965년 제1회 동인사진전을 경주 화랑 다방에서 김원영 작가와 2인 동인전을 열었다. 1965년 제3회 사진전을 청기와다방에서, 1994년 서라벌문화회관서 ‘자연과 대화’ 개인전을 가진다. 이것이 마지막 전시였다. 개인전은 모두 세 번, 동인전 1회의 전시를 가졌다.
“초창기 경주에서 영업사진을 하신 분들은 더러 있었습니다. 아버님은 영업사진도 하셨지만 애초부터 공모전이나 대회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준비하신 분이었지요. 단순한 기록사진 뿐 만 아니라 작품 사진에 대해 고민하시는 것을 보아왔어요. 당신의 철학이 담긴 연출 사진들을 보면 작품에 의미를 두려고 애쓰신 것 같습니다. 1세대 사진작가 중 한 사람이지요. 당대의 수월 김만술 조각가, 손일봉 선생, 관성 김준식 선생, 문화계 거목 이상구 변호사 등 모두 1세대 예술가들과의 교류가 전시회 방명록에서 방증되고 있으니까요”
당시 사진 작품하는 이들이 많지 않았으니 사진작가로서 위상은 독보적이었을 것이다. 동시대에선 유일한 작가이자 사진관을 운영한 이였다. 다음주, ‘경주 1세대 사진작가 최원오(崔元伍, 1917~1999) 선생 렌즈 속 경주 (下)편’이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