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까닭 모를 한 방울 눈물로 해마다/ 봄은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김동리 시(詩) ‘봄’ 끝 구절이 스친다. 햇살 빗질하는 문학관 뜰, 봄빛 가지런히 빗겨져있다. 샛노랑 덧칠한 산수유꽃망울 못다 감춘 사랑, 그립게 터트려 놓았다. 동리선생 정원에서 옮겨 심은 명자나무 꽃잎, 붉은 입매로 수줍다. 한국문단 양대 산맥의 지평을 이룬 경주가 낳은 소설가 김동리·시인 박목월 두 분의 업적을 기리고 문학정신의 맥을 잇고자 2006년 건립한 문학관이다. 경주시 불국로 406-3 진현동 550-1번지 토함산 오르는 길목에 똬리 틀고 있다. 신라천년 고찰 불국사를 마주하고 문학의 혼 지피는 발걸음 모으며 간다. 꽃피우기 위해 입덧 울컥울컥 토해내는 꽃샘바람을, 문학의 향기가 보듬고 가는 봄날이다. 여심(女心)을 건드리는 봄바람 연인삼아 걸음한 문학관의 뜨락이 봄빛으로 화창하다. 먼먼 기억을 끄집어내는 여유 꽃잎에 얹혀, 찰나의 봄빛에 혼절하는 순간이다. 회상의 책장을 넘기면 깃 넓은 흰 교복칼라 해맑은 소녀가 시집을 끼고 서성이고 있다. 별밤을 홀딱 새며 원고지 행간을 짓던 소녀의 꿈 조각들, 하늘이 가끔씩 챙겨서 그리운 색깔로 문밖에 걸어두는 나의 무지개를 본다. 동리선생의 ‘무지개’ 싯귀가 황혼의 가슴을 간지럼 먹이는 까닭이다. 가슴속에 무지개 솟는 소리/ 무지개 괴는 소리// 하늘과 땅 사이엔/ 사랑의 무지개/ 이승과 저승 사이/ 다리 놓는 무지개// 동리선생의 본명은 김시종(金始鍾)(1913~1995), 본향 경주에서 부친 김임수(金壬守) 모친 허임순(許任順), 5남매 중 3남으로 출생했다. “무슨 일에서건 지고는 못 견디던 한국 문인 중의 가장 큰 욕심꾸러기, 어여쁜 것 앞에서는 매양 몸살을 앓던 탐미파 중의 탐미파, 신라 망한 뒤의 폐도(廢都)에 떠오른 기묘하게도 아름다운 무지개여” 1995년 영면한 김동리 비석에 1주기를 맞아 미당 서정주가 지은 비문이다. 1934년《조선일보》신춘문예에 시〈백로〉, 1935년《중앙일보》신춘문예 단편소설〈화랑의 후예>, 1936년《동아일보》신춘문예 단편〈산화〉가 잇달아 당선되어 필명을 떨쳤다. 서정주 김달진 등과 ‘시인부락’ 동인을 결성하여 왕성한 시작 활동을 주도했다. 발표한 1백여 편의 시(詩) 중에 『바위』 『패랭이꽃』 시집이 있다. 동리선생 3주기를 맞아 『김동리가 남긴 詩』 유고시집을 발간했다. 김동리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은 작은오빠 국어교과서에 실린 ‘등신불(等身佛)’이였다. 문학서적이 귀했던 학창시절 새 학기 교과서를 받아오면 내 교과서는 물론 오빠들 국어책에 실린 문학작품들을 섭렵했다. 청소년기에 읽은 ‘등신불’ 까뮈 ‘이방인(異邦人)’ 샤르트르 ‘존재(存在)와 무(無)’ 등, 읽은 감동의 전율은 가슴 속 영원한 떨림으로 잠재돼있다. 1947년 무녀도(巫女圖)⦁1948년 역마(驛馬)⦁1949년 황토기(黃土記)⦁1951년 귀환장정(歸還壯丁)⦁1955년 실존무(實存舞)⦁밀다원시대(蜜茶苑時代)⦁흥남철수(興南撤收)⦁1958년 사반의 십자가⦁1961년 등신불(等身佛)⦁1978년 을화(乙火) 등 불후의 명작을 탄생시키며 현대문학사의 거장으로 족적을 남겼다. 토속신앙과 결부된 샤머니즘에 노출된 종교적 갈등을 인간의 심리에 근원을 두고 그려나간 소설 ‘을화’는 1982년 노벨문학상 본선에 진출했다. 1백여 편의 시와 80여편의 소설, 그리고 수필 평론 등 수많은 작품들을 통해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평판을 심어준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삶과 죽음의 존재론적 우주 관념에 침착된 운명을 끌어안은 작가다. 작품에 밀착된 토착적인 면모는 한국인의 정서에 순응하고 고뇌한 인간적 흔적이다. 화랑의 후예⦁산화⦁무녀도⦁황토기⦁역마⦁까치소리⦁달⦁늪⦁바위 등, 동리선생 영혼의 근원이었던 고향 경주를 바탕으로 일궈낸 작품들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시선으로 작품의 맥을 굳히듯, 옛 궁궐터와 가람 터 돌무지덧널무덤 왕릉을 배회한 걸음이 선하다. 형산강변 서천(西川) 냇물 따라 ‘무녀도’ 배경지 예기청수 소용돌이 꼭지물속을 길어 올린 작가의 안목이 용하다. 신화 속을 더듬어 천년왕궁을 걸어 나온 동리선생의 고뇌에 차면서도 유유자적한 자국이 눈에 어른거린다. 당수나무에 빌던 토속신앙의 풍속을 퍼 담는 글귀가 괸다. 어질고 순박한 사람냄새 고향냄새 서럽기도 하다. 샤머니즘의 갈등에 질문하고 화답한 작품의 깊이를 가늠하는 문학관의 뜰, 동리선생의 시 한 편 빗살무늬 혼령으로 봄빛에 빗겨져간다.그 밖에 아무것도 없네내 건너수풀 너머 언덕 위에살구꽃 복숭아꽃 개나리서껀뽀얀 안개 아지랑이 속에 엉겼네살구꽃 복숭아꽃 개나리서껀그 뒤에 먼 산먼 산 위엔구름나는 지금 구름을 보고 있네그 밖에 다른 것은 없네꽃과 나무와 산과 구름과그것만 자꾸자꾸 보고 있네그 밖엔 아무것도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