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성(孝誠)에 근본을 둔 경주이씨 송국재(松菊齋) 이순상(李舜相,1659~1729)은 학문을 궁구하며 과거 공부에 연연하지 않았고, 후진 양성에 매진해 자희옹 최치덕 등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매호(梅湖) 손덕승(孫德升,1659~1725)과 교유하였고, 계림사화의 주인공 한시유(韓是愈,1670~1723) 등과 교분을 맺고, 우암 송시열의 문집을 교열한 노론계 인물이다. 여산(礪山) 송성명(宋成明,1674~1740)이 쓴 「행장」을 보면, “공(이순상)은 나면서 기이한 자질이 있었고, 총명하며 빼어났다. … 효우(孝友)의 행실은 천성(天性)에 근본하였다. … 자랄수록 학문을 닦고 글을 배워 덕업이 날로 넓어졌고, 성리(性理)의 공부에 부지런하였으며, 과거 공부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어버이의 명으로 사람을 따라 배워 과거에 응해 거듭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끝내 과거에서 물러났다. 그렇지만 그는 얻고 잃음으로써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았고, 의지와 기개가 꼿꼿하여 세속의 구차함에 구애되지 않았다. 이때 낙중(洛中)의 귀인과 교유할 때에 마음이 맞지 않는 바가 있으면 한소(寒素)하다는 것으로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서쪽과 남쪽의 이름난 고을을 두루 둘러보며 문장의 기이한 기풍에 도움이 되었으며, 돌아와서는 과거 공부를 거절하고, 숲속 깊은 곳에 종적을 감추며 살았다”기록한다. 후학 양성을 위해 일찍이 강당을 열어 사방의 학자를 맞이하였으나, 좁은 공간에 다 수용하지 못할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배움은 오로지 효제(孝悌)의 가르침이 근본이었다. 문도들 가운데 행실을 삼가고 수신을 행하며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자도 있었고, 문과 합격자가 6명, 성균관에 합격한 사람이 10명 등 입신양명을 이룬 자도 많았다. 사람마다 언행과 행동거지를 보면 묻지 않아도 송국재선생의 제자임을 알만하였고, 이웃 마을에서 보고 감동한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양좌동 출신 이덕록(李德祿,1677~1743)의 『東皐遺稿』「輓松菊李」 그리고 이재영(李在永,1804~1892)의 『耐軒文集』「松菊齋李公遺集跋」등을 통해 그의 행적을 유추할 수 있으며, 경주 지방에서 송국재의 가르침을 받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로 학문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저서 『송국재유집(松菊齋遺集)』은 동경관(東京館)에 관한 기문 등 경주학의 소중한 사료가 되고, 서문은 경주부윤 김원성(金元性), 행장은 송성명, 묘갈명은 민형수(閔亨洙,1690~1741), 묘지명은 이규일(李圭日,1826~1904), 발문은 내헌(耐軒) 이재영(李在永,1804~1892) 등 후손의 지대한 노력으로 완성되었다. 특히 「자경오잠(自警五箴)」의 1.입지(立志) 2.신독(愼獨) 3.질욕(窒慾) 4.과언(寡言) 5.독학(篤學) 등을 통해 경주선비 송국재의 인물됨을 알 수 있다. 발문을 쓴 여주이씨 이재영은 조극승(曺克承)·유주목(柳疇睦)·이능섭(李能燮) 등과 교유하였고, 조부 이정익(李鼎翊), 부친 이악상(李岳祥)의 가계를 이루며 선공감 가감역·동지돈녕부사 등을 역임하였다.송국재 이 공 유집 발문 – 내헌 이재영 선비가 독서하여 이치를 밝히며 세상에 영달을 구하지 않고, 동굴 바위 아래에서 평생 사는 것을 비유하자면, 진주가 진흙에 빠지고, 칼을 모래사장에 묻는 것과 같다. 학식이 넓고 성품이 단아한 자가 기미를 알아 떨쳐 없애지 않는다면 비록 진주가 밝게 빛나고, 칼의 빛이 우주에 맞닿더라도 결국엔 진흙과 모래에서 생을 마칠 따름이다. 우리 고을 송국재 이 공이 진실로 ‘학문을 좋아한다(篤信好學)’라 칭송받고,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 외로워도 세태를 원망하지 않는 은덕군자(隱德君子)이시다. 숙종년간 재량과 학문이 빼어나 세상에 나아갈 수 있었으나, 산림에 묻혀 학문에 전념하고, 유가의 본분에 힘썼다. … 공께서 돌아가신 8년 후에 행의(行誼)가 조정에 알려져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특별히 추증되었으니, 특별한 예우였다. 일찍이 공의 유문(遺文)이 없는 것이 안타까웠는데, 하루는 공의 후손 이규목(李圭穆)이 선대의 원고를 들고 찾아와 “우리 선조의 말씀이 담긴 저서가 많다고 할 수 없지만, 후손들이 지켜내지 못하였습니다. 화재를 당해 중간중간 빠진 것이 있으며, 인심도심도설(人心道心圖說)과 경해정례(經解訂禮) 등은 전부 화재로 타버렸고, 낡고 좀 먹은 나머지를 수습한 것이 다만 약간일 뿐입니다. 불초한 저희들은 다만 남은 유문이 훗날 오래되고 또 소실될까 걱정입니다”라 하였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