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르네상스의 위대한 화가 피렌체의 산드로 보티첼리(1445~1510)가 지금 한국의 남도에 있다면 어떤 그림을 그릴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그가 그린 203 x 314cm의 대작인 ‘봄’은 오렌지 나무와 월계수를 비롯해 세심하게 그린 약 500여 종의 꽃들이 봄 잔치를 알리고 있다. 지금 주위를 돌아보면 보티첼리의 ‘봄’보다 더 화사하고 우리의 봄을 만나게 된다. 매화를 시작으로 산수유, 목련들이 마을과 산에 지천으로 피기 시작하면서 이래저래 움츠리고 불안한 마음들을 달래주고 있다. 땅바닥에는 노란 복수초와 새끼손톱보다 작은 노루귀, 봄까치꽃, 제비꽃들이 봄을 알리더니 사진전문가들은 연이어서 바람꽃과 얼레지, 현호색들의 소식들로 2021년의 봄을 알려주고 있다. 봄을 봄이라고 말하는 순간 봄은 이미 사라지는 것일까? 말로, 눈으로 떠드는 만큼 성큼성큼 봄은 걸음을 빨리하고 다른 꽃들이 피기를 재촉하고 있다. 조만간 경주는 벚꽃 천국이 될 것이다. 해마다, 봄마다 그 봄의 색깔이 있다. 올해의 봄빛은 유달리 더 많은 감동과 여운을 주고 있다. 지난 2020년에 우리는 우리의 봄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놀란 마음으로 무감각속에 봄이 왔고, 봄이 왔다고 만나러 갈 수도, 꽃이 피었다고 좋다고 떠들 수도 없는 시기였다. 묵언의 자세로 맞이했던 지난해와는 달리 올해는 봄기운이 우리를 희망으로 정화해주고 있는듯하다. 사진을 배우기 위해 카메라를 새로 장만하고 처음 만난 것들이 올해 봄꽃들이다. 노루귀와 변산바람꽃을 만난 순간 숨을 멈추었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면 쉽게 볼 수가 있지만, 실제로 산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작은 크기에 놀랐다. 키가 9~14cm에다가 아주 연약한 줄기를 가지고 있어서 훅하고 불면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만 같다. 그 꽃을 찍기 위해서는 카메라도, 사람들도 땅에 완전히 납작 엎드려야 한다. 때로 대포만 한 크기의 렌즈를 달고 있는 카메라도 여지가 없다. 엎드려 있다가 족히 30분은 지나야 자리에서 일어선다. 경건 그 자체이다. 이것이 진정 봄을 맞이하는 태도가 아닐까 한다. 공경하는 자세로 삼가고 조심하는 것을 경건이라고 한다. 전문사진가들이 봄꽃을 맞이하는 자세, 감탄만 하고 구경하고 지나치는 수준에서 경건으로 바뀌는 것, 경건하게 맞이하기 위해서는 지켜야 한다. 경건의 자세는 소중하고 귀한 것을 알기 때문에 우러나오는 태도이다. 그래야 우리의 봄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길고도 지루한 1년을 보내면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함부로 소비했고, 편리하게 사용했던 것들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인간들의 입을 즐겁게 하려고 사육하고 무자비하게 죽였던 많은 동물에 대해서 충분히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꽃을 밟거나 꺾지 않는다고 하는 사고에서 나노의 세계 같은 작은 아름다움도 기록에 남기려고 하는 자세는 자연에 대한 경건한 마음을 가진 인간의 본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자연과 합일하려는 동양적 사고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봄이면 매화 한송이만 피어도 멀리 있는 친구들에게 기별하여 모여서 시를 적고 이야기를 나누는 운치가 우리에게 있었다. 그러한 정신적 DNA가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수되고 있다. 자연과 동물들을 저 작고 여린 꽃들을 대하는 자세로 만난다면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어떤 백신보다 부작용이 없으면서 사랑이 충만한 완전무결한 백신이 될 것이다. 인간관계 또한 이러한 개념을 적용하여 경건한 마음으로 서로를 대한다면 사랑을 논하지 않아도 사랑이 충만하고, 어짊과 덕을 논하지 않아도 자연히 성취될 것이다. 사후약방문격인 백신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도 많다. 그러나 우리가 모두 자연의 가해자였기 때문에 일어난 사태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인 만큼, 어떤 부분들은 우리가 참고 견디며 해결해야만 한다. 봄을 맞이하는 자세로 어떤 존재도 상위가 될 수는 없다는 평등과 자유를 만끽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하는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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