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랫동안
안미옥
믿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내 얼굴이라는 것을낮에는 낮밤에는 밤의 속도로 시간이 자란다는 것을​쇠못으로 그림자를 떼어낼 수 있다는 것을*빛을 꺾어 땅속에 묻으면뿌리를 내린 빛으로 땅 밑이 환해진다는 것을​천사가 있다는 것을​천사의 손금은 깊고 복잡하다는 것을크게 웃는 사람의 침대는 슬픔으로 푹신하다는 것을​계단은 발을 숨기고 싶어 하고두껍고 무거운 문을 가진 사람일수록문이 없단 척한다는 것을​그런 차가운 얼굴을​세상은 여름부터 시작되었고꿈에서 힘껏 도망쳐 나온 방향에서 아침이 시작된다는 것을​거짓말이 발명되던 시기에 살던 새는아침마다 울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벽은 새장이 열리는 소리로 가득하다는 것을 ​미래를 닮은 유리창이 있다는 것을사람들이 맨발로 깨진 유리 조각을 밟고 서 있다​여러 겹의 얼굴이 겹쳐 흐를 때믿고 있었다 오랫동안​사람이 사람을 낫게 한다는 말을*스티븐 킹, 『악몽과 몽상』
-‘그렇구나!’ 와 ‘그렇지만’ 사이, 숨 쉬고 물결치는 감각
재미있는 시들을 읽으면 움찔한다. 그것은 개인적인 내밀한 생각이 실은 내가 품었던 생각이었다는 실감과 인식으로부터 온다. 그러나 인식만으로 다 볼 수는 없다. 이때 감각이 개입한다. 이 시는 구절마다 ‘아! 그랬지’ 그런데 ‘지금은 아니지’ 하는 실감을 하게 만들면서 운동성의 언어로 꿈틀거린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이, 밤의 시간이, 천사의 모습이, 뿌리를 내린 빛이 땅을 환하게 한다는 생각이 그렇다. 그러다 거짓말이 발명되던 시기에 아침마다 울던 새, 미래를 닮은 유리창에까지 나아가면 이 시는 현실과 환상의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이 시에서 내가 제일 깊이 공감하는 실감은 “계단은 발을 숨기고 싶어 하고/두껍고 무거운 문을 가진 사람일수록/문이 없단 척한다는 것을”에서 읽는,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 성숙된 존재의 향기다. 아직은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곧 “차가운 얼굴”로 몸을 바꿀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