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방하착을 하고 올려다보니 돌계단 위에 큰 불전이 있는데 ‘천불보전’이라는 한글 편액이 걸려 있다. 한글로 된 사찰 편액이 흔하지 않고, 주전이 천불전인 사찰은 일찍이 보지 못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본존불의 동쪽은 관음보살, 서쪽으로는 지장보살이 시립(侍立)하고 있다.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협시보살이라면 주불은 아미타여래여야 한다. 그런데 법당 안에는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한 삼존불과 그 주위로 빼곡히 천불을 모셨다. 작가 최명희는 ‘혼불’에서 “전상(前相)이 불여(不如) 후상(後相)이요, 후상이 불여 심상(心相)이라”고 했다. 앞모습이 아무리 좋아도 뒷모습만 못하며, 뒷모습은 마음이 훌륭한 것만 못하다는 의미이다. 현재의 원원사를 전상이라고 한다면 그 뒤에 있는 원원사지는 후상이 된 것이고 이 사찰을 조성한 당시 신라인들의 생각이 바로 심상이 될 것이다. 천불전을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높은 축대 위로 돌계단이 있는데 그 위에 탑 2기가 동서로 마주하고 있다. 양 탑 사이에는 화사석을 잃어버린 석등이 있고 그 뒤로 민묘가 있다. 이곳 원원사지뿐만 아니라 사찰 건물이나 탑이 서 있는 자리는 한눈에 보아도 명당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남산 여기저기 절이 있던 자리에는 민묘가 조성되어 있다. 심지어 어떤 곳에서는 석탑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묘를 쓰고 석탑의 부재를 상석으로 놓은 사례도 더러 있다. 이 자리에 있는 묘도 언젠가는 이장해야 할 것이다. 쌍탑 뒤는 금당지인 듯한데, 낮은 축대 위에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주춧돌이 보인다. 그 뒤로 강당지인 듯한 또 하나의 건물지가 있다. 옛 기와 조각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그 조각을 모아 탑을 쌓아 놓았다. 금당터 좌측 뒤쪽에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자그마한 건물이 있다. 용왕전이다. 우측 방에는 용왕을 모셔놓고 좌측 방은 바닥이 샘이다. 원원사는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 전기까지 밀교의 중심지로 번성했다. 이후 원원사의 법등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폐사되었고 석탑도 무너졌다. 이 절터는 1930년대에 일본 교토대 고고학교실 조수로 있던 노세 우시조(能勢丑三,1889-1954)에 의해 발굴되었다. 그리고 삼층석탑을 1931년 가을 경주고적보존회에서 복원하였다. 『삼국유사』 「신주」편 ‘명랑신인’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新羅京城東南二十餘里 有遠源寺 諺傳 安惠等四大德 與金庾信金義元金述宗等 同願所創也 四大德之遺骨 皆藏寺之東峯 因号四靈山祖師嵓云” 이를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 서울 동남쪽 20여리에 원원사가 있다. 세간에서 전하기를 안혜 등 네 분의 큰 스님이 김유신·김의원·김술종 등과 함께 세웠다. 네 분 큰 스님 유골을 모두 이 절의 동쪽 봉우리에 묻었다. 그래서 사령산(四靈山) 조사암(祖師嵓)이라고 한다” 이 기록에 나오는 안혜 스님은 명랑 스님의 제자이다. 밀교의 한 종파인 신인종(神印宗)의 개조(開祖)인 명랑 스님은 선덕여왕 원년(632)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정관 9년(635)에 본국으로 돌아와서, 670년 당나라가 신라를 침공해 오자 사천왕사를 건립하고 문두루비법으로 이를 물리쳤다. 명랑의 제자였던 안혜가 원원사를 창건하였는데 사천왕사와 같은 밀교 계통으로 호국불교의 성격을 가진 사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안혜와 함께 이 절을 세웠다는 김유신·김의원·김술종 3인 중 김술종은 김유신과 함께 『삼국유사』에 의하면 남산 우지암에서 열린 화백회의에 참석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절의 창건 연대는 이 두 인물이 활동하던 7세기 중후반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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