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간 향가는 759년에 마지막 작품이 만들어졌다. 이후 일본 열도에서 향가는 자취를 감추었다. 다시 일본에서 향가의 해독이 최초로 시도 된 것은 951년의 일이다. 촌상(村上)천황이 ‘이호의 5인(梨壺 五人)’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소집하여 만엽집의 해독을 명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들의 해독을 근거로 하여 여러 사람들이 해독을 시도하였으나 아직까지 완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한반도에서의 향가는 고려 초의 승려 균여(均如, 923~973)에 의해 만들어진 고려향가 11편이 마지막 작품이다. 이로 보아 973년 이후 향가 창작법이 잊혀 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반도에서의 향가창작법은 일본보다 200여 년 간 더 지속됐다. 잊혀진 신라 향가는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8년 일본인 금택장삼랑(金澤庄三郞)이라는 이에 의해 처용가의 최초 해독이 시도됐다. 그러나 향가역시 아직까지도 완전한 해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결국 향가의 해독은 우리나라는 지난 100여년, 일본은 1000여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했다.
향가는 신라향가 창작법에 의해 완전한 해독이 가능하게 됐다. 산 정상에 올라 내려다보면 등정로를 알 수 있듯이, 향가의 완독이 가능한 시점에서 이제 그간의 해독법을 검토해보니 무수한 노력에도 불구 향가해독에 성공하지 못한 원인도 알 수 있게 됐다.
1.가장큰 이유는 향가의 외관을 마치 우리말로 발음되는 것처럼 만들어놓았기 때문이었다. 서동요 첫 구절 ‘선화공주주은(善化公主主隱)’ 을 보면 우리말 비슷한 소리가 있다. ‘은(隱)`이 그것이다. 누가 보아도 우리말을 표기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의도된 장치였다. 일반인들을 향가의 깊은 뜻으로 유도해 끌고 가기 위한 미끼였다. 이 사실이 고려향가가 실려 있던 균여전의 서문에 나와 있었다.
非寄陋言 莫現普因之路
우리말이 아니면 큰 인연을 나타낼 길이 없다. 향가가 가진 심원한 뜻을 나타내기 위해 비루한 우리말(누언陋言)을 사용하였다고 하였다. 한자를 모르는 민중을 위해 우리말을 사용함으로써 그들을 향가의 세계로 이끌고자 했던 것이다. 비루한 말이란 중국어가 아닌 순수 우리말을 뜻한다. 우리말로써 민중들의 관심을 끌어 향가의 심원한 세상으로 이끌어 가고자 했다.
창작자는 얼추 우리말과 비슷하게 만들어 놓아 민중들을 끌어 가려 했을 뿐 완벽한 표음문자로 쓸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일의 연구자들은 문장 전체를 표음문자로 보려했다. 한일 양국의 연구자들은 아무리 파도 물이 나오지 않을 사막의 모래땅을 100년, 1000년 동안 머리를 싸매고 덤벼들었던 것이다. 향가가 표기된 문장은 완전한 우리말을 표기한 것이 아니었다. 표음문자로 보는 순간 창작자의 의도에 말려들어 향가해독은 실패하는 구조로 되어있었다. 무수한 사람들이 집요한 집념을 가지고 덤벼 들었으나 그들이 첫 번째 문장부터 직면한 현실은 향가는 표음문자로는 아무리 머리를 싸매도 해독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2.또 하나의 원인은 연구자들이향가를 시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향가는 시가 아니고, 일종의 연극의 대본이었다. 향가문장은 노랫말 가사와 소원을 비는 말, 무대의 배우들에게 연기할 내용을 가리켜주는 보언의 기능을 하는 문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향가=노랫말’이 아니라 ‘향가=노랫말+청언+보언’이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른 글자들을 세 가닥 새끼줄처럼 꼬아놓은 것이 향가의 문장이었다. 서동요 첫 구절을 표로 분류하여 살펴보자. 노랫말, 청언, 보언이라는 세 가닥이 꼬여 원문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노랫말만 보면 ‘섹스기법을 가르치는데 능한(善化) 공주님(公主主)은 남몰래(他密) 시집가(嫁) 두고(置)’라는 뜻이다.
청언은 하늘에 비는 문자들이고, 보언은 연극무대의 지문이었다. 상세내용은 생략한다.
향가의 문장이 기능을 달리하는 세 가닥의 문자들로 새끼줄처럼 꼬여있는 문장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대신 평이하게 나열된 한문으로 보려했으니 풀릴 리가 없었다.
두 가지 중에서도 결정적인 것은 얼핏 보아 한자를 이용해 우리말 소리를 연상시키는 표기법을 사용한 것이었다. 이러한 표현방식은 후대인들이 향가의 실체로 가는 길을 찾는데 있어 큰 장애물이 되고 말았다. 비루한 말(누언陋言-우리말)로 해독될 수 있는 문자들은 표의문자로 가보려는 시도를 원천적으로 막았다.
창작법을 앞선 사람들로 부터 전수받았던 이들은 비루한 말을 단순한 방편쯤으로 생각했겠으나, 전수받지 못한 후대인들에게는 우리말처럼 되어 있는 것이 향가의 모든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편리한 수단으로 썼던 이 방편이 만엽집의 해독을 최초로 시도했던 ‘이호(梨壺)의 5인’과 그 뒤를 이은 선각자들, 한국의 기라성 같은 향가 탐험자들의 길을 가로 막거나 잘못된 길로 이끄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향가문자를 표의문자로 보고, 향가의 문장이 세 가닥으로 꼬인 새끼줄 같다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마침내 향가의 실체로 들어 갈 수가 있었다. 향가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향가창작자들이 사용했던 방편술을 꿰뚫어보아야 할 것이다. 방편을 뚫고 심원한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