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편을 시작하기에 앞서 동국대에서 향가를 평생 연구하시다가 얼마 전 타계하신 고 이임수 교수님의 명복을 빕니다. 왜국에 액전왕(額田王)이란 여인이 있었다. 미인이자 천재가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대의 일본인에게 역사상 닮고 싶은 인물을 물었을 때 선망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 액전왕(額田王)이라고 한다. 그녀는 다수의 만엽가를 남기고 있으나 그녀의 신원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언제 태어났는지, 언제 죽었는지에 대한 기록도 없다. 다만 제명천황(재위 655-661) 시대인 660년 경에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661년 그녀는 제명천황을 수행하고 있었다. 제명천황의 둘째 아들로 대해인(大海人)이 있었다. 그녀의 첫 남자가 둘째 아들 대해인이었다. 그와의 사이에 딸을 낳았다. 딸의 이름은 십시(十市)라고 하였다. 당시의 모든 정치적 실권은 대해인의 형이었던 중대형(中大兄)이 가지고 있었다. 액전왕의 남자, 대해인의 운명도 중대형(中大兄)에게 달려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중대형(中大兄)과 따끈따끈한 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랬다. 그녀의 희망을 향가에 담았다. 9번가다. 莫囂圓隣之大相七兄爪湯氣吾瀨子之射立爲兼五可新何本 중대형님과 야단스럽게 떠들면서 원만하게 지내야지. 중대형님을 돕고 지키는 끓는 내 여울 속 남자. 겸하여 말하는데 이것 말고 새로 무엇을 근본으로 할 것인가. 이 때 역사가 요동을 쳤다. 황태자 중대형이 출병시킨 대규모의 병력이 백제의 백촌강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액전왕이 수행하던 제명천황이 사망하였고, 중대형 황태자가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천지(天智)천황이다. 그는 나당 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수도를 오미(近江)로 옮겼다. 요즈음의 자유연애와 같았을까, 액전왕은 이 무렵 남자를 바꾸었다. 대해인을 버리고 천지천황의 여인으로 신분을 세탁했다. 오미(近江)로의 천도를 둘러싸고 민심이 갈라지자 천지천황은 천도 다음 해인 668년 포생야(蒲生野)라는 곳에서 신하들과 함께 대규모 사냥행사를 개최하였다. 액전왕의 옛 남자 대해인도 이 날의 행사에 참석하였다. 사냥터에서 비밀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밀애의 노래가 이 사실을 말한다. 20번가는 액전왕의 작품이다. 그녀는 형수이자 천황의 부인이 된 자신을 대해인이 무엄하게도 유혹하는 장면을 노래로 만들어 놓았다. 밀애는 동생 대해인이 형의 여자를 숲속으로 몰래 부르면서 시작되었다. 茜草指武良前野逝標野行野守者不見哉君之袖布流 꼭두서니 염색한 붉은 옷을 입은 그가 나에게 자신을 따라오라고 풀숲을 가리킨다. 그가 앞에서 들을 달려간다. 따라오라고 표시를 하며 들을 지나간다. 들을 지키는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이를 어쩌란 말인가. 할 수없이 그를 따라가 옷소매를 풀숲에 폈다. 액전왕은 들지기(野守)라도 있다면 핑계를 대고 따라가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마저 없으니 따르지 않을 수가 없어 야단이 났다고 한다. 따라가 옷소매를 땅에 깔았고, 두 남녀는 비밀리 통정을 하였다. 꺼졌던 숯불이 다시 타올랐다. 숨기기 마련인 자신의 밀애 사실을 만엽향가로 기록해 둔 점이 미스터리다. 또 지극히 사적인 이 문건이 유출된 경위도 궁금하다. 이어 나오는 21번가는 두 사람의 밀통을 더 확고히 한다. 21번가는 정부 대해인의 작품이다. 紫草能尒保敝類 妹乎尒苦久有者人嬬故尒吾戀 目八方 그녀의 자줏빛 옷을 풀숲에 감추었다. 사리에 어두운 여인(액전왕)이 말하기를 나를 못 잊어 괴로워 한지 오래되었다고 한다. 그녀가 다른 사람(天智천황)의 여자가 된 지 오래이다. 나도 너를 그리워했다. 이 노래는 간부의 독백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액전왕이 그간 만나지 못해 괴롭다고 한 귓속말까지 기록하여 놓았다. 간부도 액전왕이 그리웠다고 한다. 간부와 간녀가 숲속에서 비밀리 주고 받은 말이 생생하고 노골적이다. 이러한 두 남녀는 밀통은 물론 역적음모도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사냥 행사 3년 후 천지천황이 사망을 앞두었다. 천황이 동생 대해인을 제쳐두고 아들 대우(大友)를 후계자로 삼을 방침을 굳혔다. 이때 액전왕은 자신의 딸을 천지천황의 아들 대우(大友)에게 출가시키고 있었다. 모녀가 부자의 여자였던 것이다. 이윽고 천지천황이 사망하자 대우황자가 아버지로부터 권력을 이어받아 집권하게 되었다. 대해인은 천황이 된 조카의 동정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비밀 정보가 들어왔다. 이어받은 조카가 숙부인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대해인은 모반을 결심하였다. 액전왕의 딸 십시황녀가 난이 발생하기 전에 남편 대우(大友)측의 동정을 빼내 어머니의 정부 대해인에게 통보하였다는 유력한 기록(부상략기, 扶桑略記)이 남아있다. 정보를 입수한 대해인이 기민하게 행동에 나서 난을 일으킨 것이다. 한달만에 도망할 곳이 없어진 대우가 목을 매어 자결하였고, 장군들이 그의 머리를 베어 대해인에게 바침으로써 난이 끝났다. 모녀는 비밀리 정보를 제공하였고, 이를 받은 대해인은 모반을 일으켜 성공하였다. 모반 성공 3년 후 딸 십시황녀가 이세신궁을 찾았다. 그 당시 만들어진 22번가에는 임신의 난에서 액전왕 모녀의 공적이 암시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河上乃湯都磐村二草武左受常丹毛冀名常處女煮手 다른 사람들은 포생야에서 사냥을 끝내고 강 위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있어도, 헤어지기 싫어 머뭇거리던 사람이 포생야에 둘(대해인과 액전왕)이 있었다. 풀숲에서 무사(대해인)께서 곁에 있어 주셨다. 붉은 깃발에 기록해 주신 공적. 이세(伊勢) 신궁에 머무르는 처녀가 손바닥을 치며 축원해 주고 있다. 위 세 작품은 ‘임신의 난’을 전후로 한 모녀의 이야기이다. 세 작품의 배치는 고의적임이 분명하고, 배치의 의도는 선명하다. 모녀가 임신의 난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혹시 이세신궁에 관광가실 기회가 있으면 향가 속에 남겨놓은 모녀의 족적을 기억해주시기 바란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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