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18년(935) 12월에 신라 경순왕이 항복해 오자 그 국도(國都)를 ‘경주(慶州)’라 칭하고 경순왕의 식읍으로 주었다. 그리고 위영을 경주 주장으로 삼아 다스렸다(‘동경잡기’ 명환)’. 신라의 멸망과 함께 왕경은 그 지위를 내려놓고 고려의 지역 도시 ‘경주’로 새롭게 출범하게 됐다. 지역에 남은 토착사회의 백성들과 지역의 지도자들은 변화된 환경 속에서 지역사회를 지켜나가며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역사 문화 도시 ‘경주’라는 명칭은 천여 년 전 그렇게 시작되었다. 경주를 찾았던 문사(文士)들에게 자취만 남은 옛 왕조의 유산은 화려했던 과거를 연상케 하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우리 문화사에 족적을 남긴 고려와 조선의 걸출한 문인들이 쓴 시들은 지금과는 달리 또 다른 눈으로 경주를 읽어내고 재발견 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고 있다.
지난 호(본지 제1477호)에 이어 이번 호(下)에서도 역시, 고려와 조선의 우리 조상들이 경주를 여행하고 남긴 한시(漢詩)와 옛 사진 등을 담아 경주의 중요 유적을 소개한 ‘우리 조상들이 다녀간 신라왕경, 경주(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19)’에서 발췌하고 인용해 재구성했음을 밝힌다. 이번호에서는 옛 절터에 얽힌 이야기로 ‘분황사’와 ‘천관사터’를, 선도산과 송화산 일대의 ‘무열왕릉’, 남산 일대의 ‘포석정’과 ‘남산’, 동남산의 ‘서출지’ 등에 관한 한시를 소개한다.
-무너진 분황사(분황폐사, 芬皇廢寺)황룡사와 마주하여 서 있는 분황사 芬皇寺對黃龍寺천년 묵은 옛터에 풀은 여전히 새롭네 千載遺基草自新우뚝한 흰 탑은 나그네를 부르는 듯하고 白塔亭亭如喚客띄엄띄엄 푸른 산은 벌써 시름 젓게 하네 靑山點點已愁人전삼이라는 말 제대로 아는 중 없는데 無僧能解前三語부질없이 장육신의 불상만 남아있네 有物空餘丈六身거리의 반이 절집이라는 소리 비로소 믿어 始信閭閻半佛宇법흥왕이 어느 시대의 요진과 같았는가 法興何代似姚秦#서거정(徐居正, 1420~1488) 이 시는 조선 전기의 문신인 서거정의 시문을 모은 ‘사가시집보유’ 권3에 실려 있다. 그는 23년간 문형을 관장하였으며 특히 시에 능했다. 서거정은 세조8년(1462) 공무로 영천에 들렀다가 경주에 온 적이 있다. 신라의 대표적 유적유물을 대상으로 한 12수의 시는 이때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시들은 후인들의 경주에 대한 규범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한편, ‘남정록’에서 김수흥은 ‘분황사는 성 동쪽 몇 리쯤에 있는데 절은 허물어진지 이미 오래다. 다만 불당이 두어 간만 있고 그 가운데에 큰 구리로 만든 불상이 우뚝 홀로 서 있으니 이 또한 옛 물건이다’라고 썼다.
-천관사(天官寺)천관이란 절 이름은 유래가 있는데 寺號天官昔有緣새로 짓는다 문득 듣고 매우 처연하네 忽聞經始一悽然정이 넘치는 화랑은 꽃 아래 노닐고 倚酣公子遊花下원망 품은 미인은 말 앞에서 울었네 含怨佳人泣馬前붉은 말이 정다워 또 길을 안 것인데 紅鬣有情還識路종은 무슨 죄로 공연히 채찍을 맞았나 蒼頭何罪謾加鞭남긴 한 곡조만은 가사가 아름다워 唯餘一曲歌詞妙달과 함께 어울려 영원토록 전해지리 蟾兔同眠萬古傳#이공승(李公升, 1099~1183) 이 시는 고려 중기의 문신 이공승의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고적조에 실려 있다. 이공승은 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추밀원지주사·동지추밀원사, 지상서이부사 등을 역임했다. 이 시는 재상 이공승이 경주의 관기(管記)로 부임했을 때 지은 것이다. 한편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발굴조사(2000~2001)에서는 탑 터, 건물터, 석등 터, 축대, 담장 및 우물 등을 확인하고 금동 불상 등 520여 점의 유물을 수습했다. (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2012~2013) 발굴에서는 건물 터 연못 터, 청동공방 터 등 다양한 성격의 유구와 유물을 확인했다.
-‘무열왕릉(武烈王陵)’상상건대, 당시 강력한 패업을 이루어 想得當年霸業強태평성대의 기운 드넓어 아득했으리 太平煙月浩范茫나누어 할거하던 삼국을 병탄하고 並吞割據三分國천지간의 온갖 전쟁터 쓸어버렸네 掃盪乾坤百戰場왕릉에는 지금도 사람들 말에서 내려도 園寢至今人下馬흥망성쇠 예부터 어쩔 수 없는 일이네 廢興從古事亡羊찬 안개 속 시든 풀에 마음 아파하는데 傷心表草来烟裏원근의 나무꾼 노래 노을 속에 들려오네 逃近樵歌起夕陽#박홍미(朴弘美, 1571~1642) 이 시는 조선 중기의 문신 박홍미의 시문집인 ‘관포집’ 상권에 실려 있다. 그는 선조 38년(1065)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정자, 경주부윤, 도승지, 이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그의 시 가운데는 경주 부윤으로 가서 쓴 것이 있으며 여러 명승지에 지방관으로 나아가 자연을 대상으로 읊은 시들이 많다. 한편 능의 동쪽에는 팔작지붕의 비각이 있으며 비각 안에는 비는 없고 귀부와 이수만 자리하고 있다. 귀부와 이수로 이뤄진 최초의 신라비로 꼽히고 있다.
-포석정에서 회고하다(鮑石亭懷古)유상곡수 잔을 나르던 자리 曲水傳觴地맑은 물이 돌에 부딪쳐 흘러오네 清流激石來천년의 유적 남은 그 자리 千年遺跡在좋은 계절 늦봄이 돌아왔네 佳節幕春廻지나는 객은 전성기 생각하고 過客思全盛지내는 백성들 경애왕을 말하네 居民就景哀오릉의 북쪽에서 상심하자니 傷心五陵北예전 못과 누대 잡초에 뒤덮였네 蕪沒舊池臺#김수흥(金壽興, 1626~1690) 이 시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김수흥의 시문집인 ‘퇴우당집’ 권2에 실려 있다. 그는 효종 6년(1655) 대과에 급제해 부교리, 대사간, 도승지, 영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김수흥은 현종 원년(1660) 사시관으로 경주를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경주를 여행한 기록 ‘남정록’에 따르면 김수흥은 3월 9일 도착하였으며 경주부의 안내를 받아 봉황대, 첨성대, 미추왕릉, 월성, 계림, 안압지, 분황사, 백률사, 금장대, 김유신묘, 포석정 등을 돌아보았다고 한다. 한편 ‘동도잡록’에서 이만부는 ‘이는 모두 신라 시대 융성한 때 연회에서 즐기기 위해 갖춘 것이다. 포석에는 이끼가 덮어 매몰되었고 정자와 누대는 주춧돌이 무너지고 섬돌은 허물어져 있다’라고 썼다.
-오산의 기이한 경치(禁山奇勝)동해 가 금자라 바라볼 만하여도 海上金龍跳望宜풍류와 운물은 그 예전과 다르네 風流文物異前時깨진 비석엔 더러 김생의 글씨 보이고 破碑或見金生字오랜 절엔 최치원이 시를 남겨 두었네 古寺曾留致速詩큰 저택은 터만 남아 거친 냉이와 어울리고 甲第有基荒善合이름난 동산은 주인 없어 낮은 담장 위태롭네 名園,無主短墙危봄시름이 이렇듯 바다보다 깊은데 春愁如許深於海철 피리를 누가 마음껏 불어 대는가 鐵笛何人滿意吹
#서거정(徐居正) 이 시는 성여신의 시문집인 ‘부사집’ 권1에 실려 있다. 한편,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평왕에서는 ‘13년(519) 가을 7월에 남산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2천8백5십4보였다’고 썼다. 남산은 신라에서 신성시되었던 산이다. 신라의 사령지(四靈地, 4곳의 영험한 장소) 중 한 곳으로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곳에서 모임을 가지고 나랏일을 의논하면 반드시 이뤄졌다고 한다. 남산은 국가의 큰일을 결정하는 중요한 곳이자 왕족 또는 귀족들이 다녀가는 일상적인 공간 그리고 종교 활동을 벌이는 다양한 성격의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출지(書出池)신라왕이 불법을 높이고 믿어서 羅王崇信沙門法날마다 승려를 궁궐로 끌어 들였네 日引繼從入九重연못 늙은이가 편지 올리지 않았다면 若也池翁書不獻당시 닥쳐오는 재앙 벗어나기 어려웠으리 當時難免剝狀凶#성여신((成汝信, 1546~1632) 이 시는 조선 중기의 학자 성여신의 시문집인 ‘부사집’ 권1에 실린 시다. 그는 글씨와 문장에 뛰어났으며 산수유람을 즐겼다고 한다. 노년엔 지방지 편찬을 주도해 역사에 남다른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중년에 경주를 유람하고 경주의 유적을 소재로 27수의 절구를 남겼다. 서출지 연못가에는 1664년(현종 5) 임적이 지은 이요당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ㄱ‘자형 정자다. ‘동경잡기’에 ‘이요당은 금오산의 동쪽 기슭에 있으며 고을 사람 임적이 지은 객당이다’라고 썼다. 1664년 이후 1736년 비바람에 훼손되어 무너진 것을 1781년, 1995년에 수리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