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기습공격한지 3년이 지난 663년 백제와 왜국의 연합군은 금강 하구인 백촌강에서 나당연합군에게 패배하였고, 최후의 근거지였던 주류성까지 무너졌다. 한반도에서의 싸움이 끝났다. 출병하였던 왜군과 백제의 군사, 군사들의 가족은 그해 8월 한반도 남단 ‘대례성’에 집결하여 일본으로 퇴각하여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였다. 당시 일본의 지도자는 천지천황이었다. 일본은 나당연합군이 현해탄을 건너 일본까지 침공해 올 것으로 보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 큐슈 등 곳곳에 성을 쌓았다. 일본의 이러한 움직임은 나당연합군의 일본 침공 가능성이 높다는 정보를 입수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천지천황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수뇌부에서는 당시 수도였던 나라(奈良)가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취약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보다 깊숙한 내륙에 있는 곳으로 수도를 옮기기로 했다. 선택된 지역은 오미(近江)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천도를 원하지 않고 은밀한 저항을 하였다. 신하들은 풍자를 하며 수도이전이 부당하다고 간하였고, 밤낮으로 실화를 가장하여 곳곳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나당연합군의 침공이 급했던 수뇌부는 667년 3월 19일 마침내 천도를 강행하여, 새로운 수도인 오미(近江)로 출발했다. 그 때의 장면을 묘사한 작품이 만엽집에 17, 18, 19번가로 남아 있다. 그들은 오미(近江)로 떠나가던 날 나라(奈良)와 신성한 산이었던 삼륜산(三輪山)에 불을 지르고 있었다. 연기는 산을 가렸고 여자들은 불타는 산을 위해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천지천황은 나라(奈良)를 마음속에서 지워버리라고 명하고 있다. 충격이다. 한 지역을 불살라버리는 이러한 내용은 지금까지 일본 역사서 어디에도 볼 수 없었던 내용이다. 17번가다. 味酒三輪乃山靑丹吉奈良能山乃山際伊隱萬代道隈伊積流萬代尒委曲毛見管行武雄數數毛見放武八萬雄情無雲乃隱障倍之也 맛있는 술 세 수레에 취한 듯 삼륜산이 불타올라 붉으락 푸르락하다. 나라(奈良)는 산에서 산 끝까지 모두를 태워버려야 하리. 만대에 걸쳐 길 모퉁이에 버려지게 하리. 너의 자취는 만대에 버려지리라. 불타는 모습을 보고 마음 속에 지워 버려야 하리. 무사들은 불타는 모습을 보고 마음 속에서 나라(奈良)를 버려야 하리. 무정한 연기는 삼륜산을 가리는구나. 18번가이다. 三輪山乎然毛隱賀雲谷裳情有南畝可苦佐布倍思 哉 삼륜산을 태우는 연기가 골짜기에 자욱하다. 여인들은 정이 있어 애써 제사를 지내 불타는 삼륜산을 슬퍼하구나. 나라와 삼륜산에 불을 질렀던 것은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한 청야전술(淸野戰術)의 일환이자, 천도를 반대하는 신하와 백성들에게 나라(奈良)에 대해 더 이상 미련을 더 이상 갖지 말라는 조치였을 것이다. 청야전술이란 방어하는 측에서 적군이 사용할 수 있는 민가, 수확할 수 있는 식량, 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우물 등 모든 것을 깡그리 불태우고 훼손시켜 버리는 전술이다. 이러한 전술은 멀리서 온 공격군의 보급을 어렵게 해 전쟁을 유리하게 끌고 가려 하는 측에서 사용한다. 세계사적으로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때 러시아가 청야 전술을 활용하여 나폴레옹을 괴롭혔고, 결국 무적 나폴레옹이 패망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만일 그때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이 실제로 공격해 와 나라(奈良)에 도착했다면 그들은 텅 빈 나라(奈良)를 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왜군들은 보급에 어려움을 겪도록 지구전을 펼치면서 게릴라전으로 당나라와 신라군을 괴롭혔을 것임은 물어보지 않아도 뻔하다. 문제는 백촌강 패배와 천도로 인하여 흩어진 민심이었다. 수습 여부가 정책의 성공여부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천지천황측은 향가의 힘에 의지하려 했다.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향가를 의지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향가는 궁지에 몰린 당대인들이 의지하였던 종교였던 것이다. 만엽집 19번가는 민심을 달래는 작품이다. 綜麻形乃 林始乃狹野榛能衣尒着成目尒都久和我勢 한 가닥 실에서 베옷이 이루어집니다. 숲이 비롯되는 것은 조그만 들에서부터지요. 덤불이 옷처럼 들에 입혀지면 숲이 된답니다. 오미(近江)에서 오래토록 화합하고, 화합해 나가면 큰 세력을 이루게 되리라. 작품의 내용은 서로 화합하자 하고 있다. 백촌강 패배와 천도문제를 놓고 군신간의 화합에 큰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말한다. 천지천황은 흩어진 민심 수습을 위해 천도 이듬해 대규모 사냥대회까지 열고 있었다. 그러나 권력은 균열되고 있었다. 반대파는 이 점을 놓치지 않았다. 천도 4년 후 천지천황이 사망하자 천지천황의 동생이었던 대해인(大海人)이 곧바로 모반을 일으켜 천지천황의 아들로부터 권력을 찬탈하였다. 조카의 대응 잘못도 있었겠으나 이것을 가능하게 한 밑바탕에는 민심이반이 깔려있었을 것이다. 천지천황이 천도해갔던 오미(近江) 도읍은 겨우 5년간 사용되고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이처럼 白村江 쇼크는 계속 일본을 뼈 속까지 뒤흔들고 있었다. 조카에 대한 숙부의 모반은 뿌리가 깊었다. 모반의 음모는 한참 이전부터 두 남녀간의 축축한 숲속의 밀애를 통해 싹이 트고 있었다. 다음에서는 일본인도 모르고 있던 만엽집 속 남녀의 밀애 이야기가 사상최초로 공개될 것이다.>>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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