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내남 이조리 출신의 도와(陶窩) 최남복(崔南復,1759~1814)은 1784년 아름다운 기암괴석이 가득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방리마을 연화산에 백련정을 지어 백련서사를 경영하며 경주의 구곡문화를 전한 인물이다. 그가 남긴 『도와집(陶窩集)』권1,「시」․「백련구곡도가 병소서십수(白蓮九曲櫂歌 幷小序十首)」는 경상도 구곡문화의 중요한 사료가 되며, 경주최씨가 반구대 골짝에 은거하면서 운암(雲巖) 최신기(崔信基,1673~1737)는 포은대 주변에 집청정(集淸亭)을 짓고, 최남복은 대곡천 상류에 백련정(白蓮亭) 등을 경영하며 산수를 즐겼다. 자연과 동화되어 살아가길 자처한 최남복의 산수관은 제암(霽巖) 최종겸(崔宗謙,1719~1792) 그리고 조부 가은(稼隱) 최종한(崔宗翰,1713~1761)과 부친 삼락당(三樂堂) 최찬(崔瓚,1732~1785) 등 가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모친은 영천의 병와 이형상의 증손인 이제송의 따님으로 외가 역시 학문이 깊었다. 공자가어(孔子家語)의 육본(六本:여섯가지의 근본)을 보면, 효의(孝義), 애례(哀禮), 용례(勇戰), 농정(農政), 사국(嗣國), 역재(力財) 등을 언급한다. 이 모두가 중요한 덕목이겠지만, 예나지금이나 효도와 우애는 긴밀한 관계가 있어왔다. 최남복 역시 1792년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는 관심 없고 부모봉양에 힘을 쏟았다. 생전에는 지극하고, 돌아가신 후에도 묘소 아래에 집을 짓고 살면서 부모자식 간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였다. 공자는 인생 세 가지 즐거움으로 공부와 친구 그리고 나를 알아주는 일 등을 통해 평생의 즐거움으로 살았고, 이외에도 현자들이 언급한 다양한 세 가지 즐거움은 지금도 타인의 모범이 되어 현재를 살아가는 삶의 지표가 되기도 한다. 특히 도와 최남복의 부친 최찬은 스스로의 즐거움을 첫째, 선대의 뜻을 받들어 삼락당을 지은 일, 둘째, 세상에 부끄러움이 없는 일, 셋째, 선대의 유지가 후손에게 이어지는 일 등 소소한 즐거움을 확립하였다. 인간으로 태어나 자신을 낳고 길러주신 부모를 위해 헌신하는 자식의 삶은 진정한 순리의 행동이었고, 혼탁한 세상의 벼슬아치보다 자연을 관조하면서 부모를 모시는 소소한 즐거움은 대대로 이어졌다. 삼락당은 부친의 호를 말하면서 선대의 유지(遺志)가 서린 공간이다. 최남복은 가학을 계승하고 선대의 유업을 지키기 위해 다음과 같이 「삼락당기」를 남겼다.삼락당기(三樂堂記)조부 가은(稼隱) 최종한(崔宗翰) 공은 행실과 학문이 빼어났으나 영달(榮達)을 구하지 않으셨고, 물러나 농사짓고 밭을 일구며 사는 것으로 스스로의 즐거움으로 삼았다. 거처로 도모하여 기초의 재목이 이미 갖춰지고, 먼저 조부께서 ‘花溪’ 큰 두 글자를 빌어 걸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부친 최찬(崔瓚)이 당구(堂構)를 받들어 권면하였으나, 삼가 두려웠고, 계사년(1773) 겨울에 장인(匠人)을 불러 상의하고 의논하여 3년여에 완성하였다. 그 규모는 2가4영(二架四楹)으로 동쪽에 당(堂), 서쪽에 실(室)을 두었고, 북쪽에 작은 누(樓)가 있어 고서(古書)와 유문(遺文) 수천권이 소장되었다. 이에 부친 최찬이 지족(知足:분수에 만족함)의 글을 청하여 삼락당(三樂堂)으로 편액하였다. 자녀를 둘러보고는 “삼락(三樂)의 의미를 아느냐?”하자, “부모가 다 살아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과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는 것과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이 맹자의 삼락입니다(父母具存兄弟無故 不愧不怍 得英材敎育 鄒夫子三樂也). 그리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과 남자로 살아가는 것과 장수하는 것은 영계기(榮啓期:榮聲期)의 삼락입니다. 그리고 안자(顔子)의 삼락은 밭을 일궈 의식을 해결함과 거문고를 연주함과 스승 공자를 배우는 일입니다”라 대답하였다. 부친 최찬은 “그렇기도 하지만, 나는 스스로의 즐거움이 따로 있다. 어린 너희들이 어찌 나의 능함을 알겠는가? 마침내 선대의 뜻을 받들어 이 삼락당을 지은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여기저기 옮겨 살면서 세상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후손들이 뜻을 지키고 깨뜨리지 않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너희들은 명을 듣고 물러나 감히 기록으로 남겨, 우리 후손들이 알도록 하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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