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산물로 탄생한 오페라는 피렌체, 베네치아, 나폴리를 중심지로 명맥을 이어갔다. 100여년이 흐르는 동안 귀족에서 평민으로 관객층이 확산되고, 심각한 내용에서 벗어나 장난스러운 이야기도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서정적 비극이라 불리는 고유의 극예술을 갖고 있던 프랑스에 이탈리아산 오페라 부파가 침투하면서 평지풍파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처럼 18세기 오페라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프랑스식 오페라인 서정적 비극은 자국의 전통 연극에 발레를 버무린 형태다. 부퐁논쟁을 통해 그 약점(부자연스러움)이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한편 이탈리아 오페라(세리아)는 고질적인 문제를 갖고 있었다. 극의 내용보다는 성악적 기교를 중시했다. 당대의 아이돌 스타였던 카스트라토의 인기에 편승했던 것이다. 오페라의 나이가 백 살을 넘어서면서 개혁의 필요성이 점차 대두된 것이다.
이때 오페라 개혁을 이끈 사람이 바로 글루크(C.W Gluck/1714-1787)다. 그는 독일 태생이지만, 온 유럽을 활동무대로 누비며 국제적인 감각을 키워 온 인물이다. 글루크의 오페라 개혁의 핵심은 ‘음악이 줄거리에 봉사’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1762년에 초연한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를 통해 구현되었다. 줄거리는 사실적으로, 구성은 자연스럽게, 음악은 극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게 했다. 또한 독창을 줄이고, 합창의 비중을 늘렸다. 이 작품은 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념비적인 무대라는 극찬을 받으며 큰 성공을 거둔다. 글루크의 개혁은 동시대를 살았던 모차르트와 베토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마술피리와 피델리오는 극과 음악이 조화를 이루는 대표적인 작품에 속한다. 특히 100년 후배인 바그너의 음악극은 오페라 개혁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바그너도 성악적 기교를 중시했던 이탈리아 벨칸토 오페라를 극복하고 대안을 제시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파리의 가르니에극장은 샤갈의 천정화로 유명하다. 천정화에는 모두 14명의 작곡가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중에서 가운에 위치한 네 명이 누군지 아는가? 악성 베토벤, 오페라의 왕 베르디, 프랑스의 스타 작곡가 비제, 그리고 놀랍게도 글루크다.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놈’이란 뜻)인 줄 알았던 글루크의 예술적 성과는 베토벤, 베르디, 비제에 맘먹는 정도로 위대한다는 반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