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림으로 에워싼 낮은 언덕배기로 겨울을 갈무리하려는 빛 부신 햇살이 깔려있다. 해묵은 소나무 잎 푸른 솔가지 사이로 새떼가 노래를 얹어놓는다.
매화가지 연분홍꽃잎을 물고, 생강나무 꽃빛노랑 둥근 구슬을 꿰찬 종달새 지저귐 왕릉을 들썩인다. 소나무 아래 흙살거름으로 깔린 퇴색한 솔가리를 걷어보면 여린 들풀 쏙쏙 싹을 틔웠다.
봉분 앞 남남동 방향으로 살짝 치우쳐 안상무늬 장식을 한 사각상석(床石)도 봄을 기다리는 심정이다. 가늘고 얇게 음각한 안상문(眼象紋)이 앞뒤와 양 측면에 새겨져있다. 맨 아래 큼직한 받침돌 위에 놓인 상석의 높이는 120㎝이다. 천년세월 세파에 시달린 흔적 멀쩡하게 보존상태가 탄탄하다.【삼국사기】 ‘4년 봄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여 벼슬을 주었다. 예전에는 활쏘기만으로 인물을 선발하던 것을 이때에 와서 바꾼 것이다’
무술연마로 채용하던 벼슬을, 학문으로 실력을 인정했다. 일종의 과거제도로 인재를 등용한 것이다 ‘6년 벽골제를 증축하였다. 전주 등 일곱 주의 사람을 징벌하여 이 공사를 하였다’
농사를 지울 때 가뭄을 대비한 효율적인 방법으로 저수지를 건설한 것이다. 저수지를 축조할 때도 각지의 실력 있는 기술자를 뽑아서 쓴 신중함을 알 수 있다.
원성왕 당시 ‘풍속은 신의를 중시하고 지조는 바르며, 유교의 풍습을 받들어 예법이 성행하고 나라가 평안하게 다스려졌다’는 기록들이 전해진다. 나라의 번영과 백성의 안정을 향해 국정을 실천하는 예지의 왕임을 실감한다.【삼국유사】 ‘일본 왕 문경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다가, 신라에 〈만파식적(萬波息笛)〉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군사를 물리치고 금(金) 50냥을 사자(使者)에게 주어 보내서 피리를 달라고 요청했다. 왕이 이르기를 “나는 들으니 상대(上代) 진평왕 때에 그 피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이듬해 7월 7일에 다시 사자를 보내어 금 1천 냥을 가지고 와서 청했다. “내가 그 신비로운 물건을 보기만 하고 그대로 돌려보내드리겠다”고 하였다. 왕은 역시 먼저와 같은 대답으로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 은(銀) 3천 냥을 그 사자에게 주고, 보내 온 금은 돌려주고 받지 않았다. 8월에 사자가 돌아가자 그 피리를 내황전(內黃殿)에 감추어 두었다’
흔들림 모를 책임감과 지혜로운 기백이 꽉 찬 원성왕의 뜻이 얼비치는 대목이다. 능원을 거닐다 만나는 4마리의 석사자들은 동서남북으로 고개를 향하고 있다. 눈과 코의 형상이 큼직하다. 갈퀴와 털은 섬세한 선으로 나타냈으며 꼬리는 엉덩이에 붙여 표현했다. 대좌 위에 앞발을 세우고 엉덩이를 땅에 댄 자세, 오른쪽 발은 땅을 짚고 왼쪽 발은 땅을 파헤친 자세 등 천진난만한 표정들이다. 용맹성의 생동감보다는 귀 쫑긋 세운 해학적 요소에 쓰다듬어 주고픈 돌사자들이다.
사자(獅子)라는 용어는 기원전 3세기경 인도에서부터 쓰여 졌다. 아쇼카왕의 석주(石柱)에 형상화 되면서 불상의 대좌에도 사자좌(獅子座)가 표현된다. 범어로 simha라고 하며, 불교경전에서는 사자(獅子)를 사자(師子)로 쓴다. 석가모니를 수호하는 성수(聖獸)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 중국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수용하면서 불법의 수호자로서 사자상이 도입된다. 불상의 대좌를 비롯하여 능묘, 불탑, 부도, 석등, 수미단, 귀부 등 석조물에 등장한다. 다양한 자세로 나타나는데 좌상(坐像), 입상(立像), 도무상(跳舞像) 등이다.
원성왕릉 봉분에서 전방 80m 거리에 있는 석사자 위치를 두고 논의가 끊이지 않는 실정이다. 진홍섭, 변영섭, 이근직은 괘릉의 4사자상도 흥덕왕릉처럼 원래 능의 네 모서리에 배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어느 때 옮겨지지 않았을까 추론하고 있다. 42대 흥덕왕 능묘를 조성할 때 38대 원성왕 능묘를 본받았다고 추정하는 까닭이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물음표가 아닌 느낌표를 달아보는 땅 넓은 능의 품안이 처연하다.
팔뚝 굵은 덩치의 힘센 남정네들이, 돌로 굳어 꿈쩍 않고 서있는 원성왕릉이다. 서역인 사나이는 곱슬머리 이마에 머리띠를 매고 짙은 눈썹에 부릅뜬 눈이다. 광대뼈 불거진 뺨으로 주먹코 주걱턱을 가졌다. 구레나룻수염 각진 험상궂은 표정이다. 몽둥이를 거머쥔 화강암 굳은돌로 포부가 불끈한 인상파 사나이들이다.
하지만 이국만리 떠나온 향수를 더 감추지 못하고 구겨 넣는 쓸쓸함을 신라여인에게 그만 들키고 말았다.
내 어린시절 울할매 설빔으로 꿰매준 헝겊쪼가리 복주머니와 흡사한 손바닥만 한 산낭(算囊)주머니를 뒤춤에 차고 있다. 눈은 움푹 들어가고 코는 튀어나온 심목고비(深目高鼻) 석인상이다. 머리에 중앙아시아 터번을 두르고, 키 2.4m 거구의 서역인이다.
물건을 저울질할 때 쓰는 통나무저울을 꽉 쥐고 있다. 뒤 허리춤에는 돈을 셈할 때 사용하는 계산기 산낭주머니를 차고 있다.
이역만리 이별도 꿰차고 산 넘고 바다건너 신라 땅까지 돈 벌러 왔지 싶다. 이 석인상에 대해서는 페르시아인·아라비아인·이란인·오만인 등 추측이 분분하다. 역할에 관해서도 무인상, 무역상, 병사상, 등 학자마다의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강우방은 실크로드Silk Road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소그드Sogd인으로 보았다. 통일신라는 동아시아 문화의 중심지였던 당(唐)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630년 서역(西域)까지 영토를 확장한 후 수도인 장안(長安)은 국제도시로 탈바꿈했다. 신라는 외교사절과 외래문화를 적극 수용했다.
중앙아시아의 소그디아나 출신 상인들과도 밀접하게 교류했던 것이다. 그 역사의 흔적들을 싣고 가는 원성왕릉이다. 안타깝게도 1926년, 1946년 도굴미수사건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