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서 70년 대 이전 시기를 산 사람들은 지금의 경주가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기억할 것이다. 대릉원 담장 속, 능묘 사이사이 놓여 있던 인가들이며 황남동 고분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던 인가들, 반월성에서 향교 사이로 늘어서 있던 인가들이며 쪽샘 주변을 비롯한 황남동, 구 교육청을 중심으로 한 인왕동, 그 외 사정동과 황오동, 황성동 인가들이 전부 유적지 발굴 혹은 정비라는 ‘대의명분’ 아래 헐렸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가족과 이웃이 흩어져 낯선 곳에서 새 삶을 시작해야 했다. 그 시대에는 보상도 형편없어서 그저 정부나 시에서 선 그면 긋는 대로 주민들은 이사를 가야했고 어디 불평이나 불만을 제기할 수도 없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그 많았던 인가들이 아직도 자체의 미관을 고쳐가며 보존되어 왔다면 경주의 오늘날 모습은 어땠을까 궁리해보면 마치 교토나 파리, 로마를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유적 주변으로 인가와 상가들이 밀집함으로써 유적이 활기를 띠고 주민이 유적으로 인해 많은 혜택을 누리는 모습들은 경주에서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발굴은 당연히 중요하지만 발굴후의 토지가 전부 공터로 변해 버린 경주는 여름날 음료수 하나 사먹을 수 없는 ‘사막고도’로 바뀌어 버렸다. 오죽하면 이 인구밀집 지대가 사라짐으로 인해 계림, 월성, 황남초등학교가 급격히 쇠락하고 심지어 황남초등학교는 용황동으로 이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람들로 흥청이던 구도시 중심상가들은 8시만 되도 무인지경 상태로 변해 폐업점포가 늘어나고 있을 지경이다.
봉황로에 아무리 돈을 퍼붓고 온간 현란한 전구로 치장을 해도 주변 인구가 사라진 마당에 이 지역 상가가 활성화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유적만 덩그러니 남은 도시, 사람이 사라진 고도는 바로 이런 도시 붕괴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유적지 개발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경주어반스케치’를 이끄는 전시형씨의 2월 15일 페이스북에 올라온 문화재 정비구역의 철거현장은 그래서 더욱 을씨년스럽다. 화폭에 담긴 그림은 상세한 묘사로 정겹기까지 하지만 비었을 집이 가진 아픔과 허망함까지 느껴진다.
전시형 씨가 그린 그 사람이 살던 땅에 유적지 발굴 후 다시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어떨까? 원래 사람이 살던 땅이었으니 무리도 없을 것이고 살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면 유적들의 가치가 훨씬 높아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