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칼럼은 조금 예민한 내용에 대해 한번 써볼까 한다. 향가의 원산지 증명 이야기다. 금관을 만드는 문화는 어디에서 출발해 경주로 왔을까. 금관 연구자들은 원산지를 알아내기 위해 여러 지역의 금관들을 조사하여 만들어진 시기와 제작기법을 비교한다. 금관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알아 내려 하는 것이다. 향가도 금관과 같은 방법을 동원하면 원산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향가가 발견된 나라는 현재까지 전세계에서 대한민국과 일본 단 두 나라 뿐이다. 중국이나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동남아는 물론 멀리 유럽 그 어디에서도 향가 유사제품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른 고대 유물들과는 달리 유독 공간적으로 갇혀있다. 문화란 바람과 같이 어디에선가 생겨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기에 향가 문화 역시 어딘가에서 탄생되었다가 고대 동북아 쪽으로 불어왔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향가와 만엽의 작품이 같은지 다른 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러던 차 필자의 논문이 나와 신라의 향가와 일본의 향가가 구조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점을 밝혔다. 과학적으로 말하면 하나의 DNA가 자기복제를 해놓은 것같았다. DNA가 이중나선 구조를 가진 것과 비슷하게, 향가도 노랫말 + 청언 + 보언이라는 삼중나선 구조로 짜여있다는 이론이 `신라향가 창작법`이다. 이로 향가를 풀어보면 만엽집 속에 실린 작품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신라향가와 동일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만엽집의 작품과 향가는 동일한 DNA에서 복제되어 나온 오누이 사이였다. 향가는 나라와 사회를 많이 생각하며 서울로 간 오빠였고, 누이는 항상 눈물을 달고 살던 가녀린 소녀였다.
드디어 예민한 질문으로 들어간다. 향가는 어느 시기에 만들어졌느냐는 질문은 원산지와 연결된 질문이기에 예민하다. 고대문화 전반에 걸쳐 원산지 문제만 나오면 한일 두 민족은 세계 사람들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투닥거리며 싸우려 든다. 급기야는 산에 사는 벚꽃을 두고도 서로 자기 나라가 원산지라고 싸우고 있다. 문화는 바람과 같은 것이어서 쏘이는 자의 것이다. 쏘이는 자는 시원하고, 부채질하는 자는 힘만 든다. 쏘이는 쪽이 상전이고, 부채질 하는 쪽이 하인이다.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문화는 먼저 만들어진 곳에서 나중 만들어진 곳으로 흘러 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만들어진 곳이 원산지인 것이다.
일본과 한국에서 향가가 최초로 만들어진 시기를 각각 체크해보자. 필자는 일본 만엽집 권제1에서 시기적으로 가장 빠른 작품은 1번가가 아니라 2번가로 본다. 일본인들은 1번가의 작자를 웅략(雄略)이라는 천황으로 보고 있다. 서기 456~479년 간이 웅략천황의 재위기간이다. 그러나 그가 실재의 천황이라는 증거가없어 단순한 주장에 그치고 있다. 존재 자체를 의심받고 있는 것이다. 존재가 확실한 작자로는 2번가를 지은 서명(舒明)천황이다. 그의 재위기간은 629~641년이기에, 630년대가 되면 왜국에 향가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필자는 이 연대는 신뢰할 수 있다고 본다.
대한민국 최초의 향가는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년) 때 만들어진 ‘서동요’다. ‘서동요’는 진평왕이 맛둥이가 퍼뜨린 가짜뉴스에 속아 딸 선화공주를 멀리 유배보냈다는 그 작품이다. 따라서 500년대 말 무렵이면 신라에 향가가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왜국보다 대략 50년이 앞선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400년대 웅략천황을 내세워 일본 기원설을 주장할 것은 뻔하다. 원산지 전쟁이 또 터지는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일본인들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비장의 개봉박두 사실이 있다. 그들의 일본기원 주장을 깨뜨릴 무기가 우리에게 있다.
그것은 놀라운 사실이었다. 뜻밖에도 삼국유사에 ‘김수로왕이 향가를 가지고 왔다’는 사실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서기 42년 김해 구지봉에서 김수로왕이 알에서 태어날 때 김해지역의 백성들이 떼로 춤을 추며 ‘구지가’를 불렀다고 되어있다. 그 ‘구지가’를 ‘신라향가 창작법’으로 해체하면 ‘한시’가 아니라 ‘향가’였던 것이다. 가야라는 나라가 생기기도 전에 향가가 불리워졌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일본인들은 물론 우리까지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 사실은 논쟁적이다. 향가와 만엽을 풀어 낼 수 있는 정교한 이론체계, 즉 ‘신라향가 창작법’이 42년 가야땅에 향가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밝혀준다. 명백한 사실이었다. 필자는 이 사실을 조만간 학계에 논문으로 제출하여 입증하고자 한다. 논문 게재 후 사용하려고 감추어 두었으나 세계 향가의 수도, 경주시민들을 존경해 먼저 귀띔해 드린다. 성급하다고 꾸짖지 마시고, 원래 조금 조급한 사람이라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한일간 최초의 향가 제작시기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서기 42년 가야땅에 향가가 있었고 630년 경이 되면 왜국에도 향가가 있었다’
일본인들의 문제제기를 받아들인다 하면 다음과 같이 수정될 수도 있다.
‘서기 42년 가야땅에 향가가 있었다. 479년 경(웅략천황), 더 인심 써 313년부터 399년 무렵(인덕천황)이 되면 왜국에도 향가가 있었다’
아무리 적어도 한반도가 300여년을 앞서 있었다. 다른 사정이 없다면 향가 원산지 전쟁에서 우리는 일본을 물리칠 수 있다. 다만 김수로왕이 직접 만드셨는지, 어디에서 가져오셨는지가 문제로 남을 뿐이다. 향가는 한반도에서 사용되다가 일본 열도로 건너갔던 것이다. 제작기법은 신라향가 창작법이었고, 일본에 흘러들어간 시점은 서명(舒明)천황 재위기간(629~641년) 무렵이었다. 일본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만엽집 2번가를 소개한다.
山常庭村山有等吹與呂布天乃香具山騰立國見乎爲者國原波煙立龍海原波加萬目立多都怜怐國曾蜻嶋八間跡能國者
산에 기를 설치하고 마당을 꾸밈없이 만들었다. 산에 고기를 차려놓고 여럿이 관악기를 취주하고 음률을 펼치도록 하였다. 하늘에 닿도록 향구산이 솟아 올라 있다. 나라(國)를 내려다 보니 벌판에는 연기가 용처럼 솟아 오르고, 바닷가 벌판에는 수많은 우두머리들이 살고 있다. 영리하건 우둔하건 나라의 잠자리들이 섬 사이를 왕래하며 화목하게 지내는 나라가 되도록 해주시라.
일본의 향가는 하늘에서 뚝하고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누이가 630년 경 돛단배를 타고 검은 바다 현해탄을 건너갔던 것이다. 다만 가야의 나루터에서 배를 탔느냐, 신라에서 갔느냐, 백제의 포구를 거쳐 검은 바다를 건넜느냐 하는 문제는 조금 더 연구해야 할 것이다. 그녀가 떠난 눈물의 나루가 어디인지 판단할 정보를 죄송스럽게도 필자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 향가의 새벽에 왜국에 건너갔던 눈물 많던 우리의 소녀는 누구였을까? 그 눈물소녀의 활약을 다음 편에 설명드리겠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