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275호로 지정된 ‘기마인물형토기’를 포함해 평생 애써 수집한 문화재 666점을 수차례에 걸쳐 국립경주박물관에 흔쾌히 기증함으로써 개인소장자의 사표로 전해지고 있는 이가 있다. 고 국은(菊隱) 이양선(李養璿) 선생(1916~1999)이다. 선생은 ‘문화재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민족의 문화유산’이라는 평소의 소신대로 이를 영구 보존하고 연구하는 차원에서 1985년부터 1987년까지 국립경주박물관에 수집문화재를 기증했다. 국립경주박물관은 기증 유물의 사진과 도면·해설을 갖춘 도록 ‘국은 이양선 수집문화재(1987)’를 발행하고 그 높은 뜻을 기리고 기념하기 위해 선생의 아호를 딴 ‘국은기념실’을 마련해 도기기마인물형 뿔잔(기마인물형각배, 국보 제275호)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재를 상설전시하고 있다. 2020년 국립경주박물관은 신라역사관을 새롭게 단장해 문을 열었는데 특히, 기존 신라미술관에 있던 국은기념실을 이전해 재구성했다. 지난 17일과 18일, 문화유산의 아름다운 공유를 몸소 실천한 국은 이양선 박사의 숭고한 뜻을 재조명하는 공간인 국은기념실을 찾았다. 본 기사는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실과 도서실에서 제공한 아카이브 자료와 도서자료를 바탕으로 미흡한 소략에 불과하지만, 평생을 관통한 국은 선생의 높은 뜻을 다시 한 번 기억하고자 재구성해보았다. -국은 이양선 선생...평생 인술 펴는 한편, 남다른 애정으로 문화재 수집하고 연구해// 수집 문화재 대부분이 고고학적 가치 지닌 매장문화재로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 국은 선생은 1916년 평양에서 태어나 고구려 역사의 향기 속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숭실중학교를 거쳐 1938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전신)를 졸업한 뒤, 평양의 기독병원과 시립병원에서 이비인후과 전문의로 지냈다. 한국전쟁 이후부터 1981년까지 경북대학교 의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대구에 정착했다. 정년퇴임 할 때까지 30여 년 동안 이비인후과에서 명성을 떨친다. 이비인후과 관련 학회의 중책을 여러 번 맡았으며 1992년에는 이양선 이비인후과 의원을 열어 의사로서 진료에 매진해 널리 인술을 펼쳤고 1999년 12월, 83세로 별세한다. 이양선 선생은 평생 대학병원과 종교단체의 병원에서 인술을 펴는 한편, 전통문화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문화재를 수집, 연구했으며 문화재를 감상의 대상이 아닌 학술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인식해 우리나라 고고학과 미술사학 연구에 중요한 많은 문화재를 수집했다. 선생이 본격적으로 문화재를 모으게 된 것은 한국전쟁으로 우리 사회가 어지러웠던 시절 대구에 온 후부터였다. 크게 여유는 없었지만 비교적 안정된 직업을 가졌던 선생은 학교와 병원, 집을 오가는 길에 만물상과 골동상을 들르는 것이 일과처럼 돼 집안 살림을 돌보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유물을 보는 눈을 키웠던 선생은 점차 독보적인 감식안을 갖게 되었고 유물의 학술적 가치에도 눈을 돌린다. 수많은 유물들이 해외로 흩어지던 시절, 문화재 보호의 중요성에 일찍 눈을 떴고 일괄유물의 중요성과 출토지 확인에까지 미치는 학술자료수집단계의 경지에 도달한다. 선생이 수집한 문화재는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치는 것이었고 석기, 토기, 금공품, 철제품, 옥제품 등 모든 분야에 달하고 있었으며 지역으로는 경상남북도 영남권에 한정돼 있었다. 1950년대부터 대구와 경주를 비롯한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문화재를 수집하기 시작해 이후 1990년대까지 문화재 수집에 힘을 쏟았는데, 특히 수집 문화재 대부분이 도자기나 그림이 아니라, 고고학적 가치를 지닌 매장문화재로 경상도 지역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이 많았다. -“문화재는 재화적인 가치로만 생각할 수 없으며 개인의 것 아니라 민족의 문화유산” 1985년부터 293건 666점 국립경주박물관에 기증 토요일과 일요일엔 일과처럼 경주를 찾았다는 선생은 검소하게 살았던 일화가 많다. 문화재 기증으로 전 국민의 시선을 끌었지만 운동화에 점퍼 차림이었다고 한다. 평생을 두고 모은 그의 수집품은 선생의 숙고 끝에 1985년 3월, 1986년 5월, 1987년 12월 등 수차례에 걸쳐 293건 666점(금속, 옥석, 토기, 골각, 기타 등등)이 국립경주박물관에 기증돼 국은 이양선 콜렉션을 이루게 된다. 선생은 “문화재는 재화적인 가치로만 생각할 수 없으며 개인의 것이 아니라 민족의 문화유산이다. 이를 영구히 보존하고 연구해 민족의 전통과 예지를 여기에서 찾아내야 한다”라는 소신을 지녔던 이다. 선생의 수집품은 주로 선사시대부터 통일신라에 이르는 경주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고고학적 자료가 주류를 이루고 있어 경주박물관과 가까이 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기증해 영구히 보존해야겠다는 뜻을 굳힌 듯하다. 그 큰 뜻의 시작은 기마인물상이었다. 이 문화재는 지금도 가장 중요한 전시품으로 손꼽힌다. 박물관에서는 1986년 9월 선생의 기증문화재 첫 전시를 열었다. 1987년에는 그 중 정수를 골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별전시회를 가진다. 이후 1987년 5월부터는 상설전시로 이어져 지금에 이른다. -1980년대 중반 당시 수백억 원 어치 문화재 기증하고 “모두 경주박물관에 갖고 가. 기탁이 아니고 완전기증이야. 나중 도록이나 한 권 보내주시오”// 3차에 걸쳐 오동나무 상자 속에 솜으로 겹겹이 감싸 2.5t 트럭 3대 동원해 경주로..., 주간조선(1986년, 제909호)에서는 ‘기마인물상 토기는 이번에 이 박사가 기증한 문화재 중에서도 최고로 손꼽히고 있다. 5~6C 삼국시대 가야식으로 추정되는 이 토기는 말과 사람이 완전한 전투무장을 갖춘 형태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발견이었기 때문이다’ 라고 쓰고 있다. ‘이 박사가 수집해 온 문화재를 기증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경북의대 퇴직 무렵이었다. 노후를 경주에서 보낼 마음으로 그는 경주 모 병원과 교섭을 벌였으나 몇 가지 문제로 대구에 다시 주저앉고 말았지만 그는 언제나 신라와 신라인에 대한 향수에 젖어 있었다고 한다. 주말엔 자가용도 없으면서 반드시 경주엘 갔다. 30여 년을 보고 또 보았지만 그래도 다시 보고 싶은 게 이것들이라며 전시실 앞을 떠날 줄 모르더라는 것이다. 이즈음 문화재 기증의사도 조금씩 비쳤다. 그렇지만 이 박사가 안 먹고, 안 입고 평생을 모은 것이기에 박물관측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1985년) 3월 경주박물관팀이 이 박사집을 찾았다. 3백여 점을 기증하겠다는 통보를 받고서였다. 좁은 집에서 엄청난 양의 유물이 쏟아지자 직원들은 모두 충격을 받았다. 대략 국보급으로 추정되는 것만 고르고 난 뒤 기탁증서를 주려고 하자 이 박사는 필요없다고 거절했다. 며칠 후 유물을 정리하던 직원들 앞에 나타난 이 박사는 몇 가지 분류의 오류를 정확히 지적하기도 했다. 그리곤 “모자곡옥(母子曲玉)이 어디 있느나”며 물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잠시 빌려갔다”는 대답에 이 박사는 “경주박물관에 맡긴 것인데…”라며 상당히 섭섭해 했다. 한편, 1백여 점의 곡옥 중에 2개가 없어진 것을 한눈에 알만큼 자신이 수집한 물건에 대한 기억력이 뛰어났다. 1차 기탁이 있은 후 이 박사를 만난 당시 정 관장은 “제2별관 전체를 전시실로 꾸밀테니 화려한 금제귀고리를 내놓으라”며 은근히 강요했다. “그 귀고리들을 사실은 자식들에게 나눠 주려고 집사람에게 슬며시 이를 떠보았더니 ‘벽창호 같은 영감’이라며 구박만 받았다”고 관장에게 털어놨다. “자식들이 나눠 갖고 있어 보았자 흐지부지될 것 같다며 말리더군. 또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재벌그룹에서 끈질기게 찾아와 팔라고 졸라대더군. 수집한 노력이 다르다며 쫓아 보냈어. 모두 경주박물관에 갖고 가. 기탁이 아니고 완전기증이야. 조건은 딱하나. 기증유물 도록이 나오면 자식들에게 꼭 보내줘야 돼” 3차에 걸쳐 이 박사의 유물은 오동나무 상자 속에 솜으로 겹겹이 쌓인 채 경주로 운반됐다. 2.5t 트럭 3대가 동원됐다. 이 박사의 문화재는 오는 9월8일(1986년) 일반전시를 앞두고 지금 정리중에 있다. 제2별관 3백평 전시실이 비좁아 간격없이 백뻑이 진열되고 있다. 이 박사가 이제 바라는 소망이 하나 있다. 예산이 없어 지체되는 기증문화재 도록 제작이 빨리 진행되는 것이다’라고 썼다. 1987년 12월, 선생의 바람대로 기증품이 드디어 한 권의 도록으로 발행되고 이 도록 제작은 기증자인 선생의 단 한 가지 기증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바로 ‘완전한 도록이나 한 권 만들어주면 아들이나 딸, 지인들에게 나눠주고 싶다’는 소박한 뜻의 갈음이었다. -국은 수집 기증품, 단순한 미적 감상의 대상이 아닌, 학술적 가치를 지닌 고고학 계통의 자료 많은 것이 특징 국은 이양선 선생이 수집해 국립경주박물관에 기증한 문화재는 단순한 미적 감상의 대상이 아닌, 학술적 가치를 지닌 고고학 계통의 자료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선생은 문화재를 수집할 때, 출토지와 출토 상태를 꼼꼼하게 추적하였을 뿐만 아니라, 출토품과 함께 있었던 모든 것을 확인하고 검증했다. 문화재의 학술적 가치에 대한 그의 집념은 훗날 국보로 지정된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의 수집 과장에서 잘 드러난다. 당시 선생은 완형도 아니었던 도기기마인물형 뿔잔을 더 비싼 도자기를 주고 바꾸었을 정도다. 이는, 선생이 이 문화재가 지닌 자료적 가치를 잘 파악했기 때문이다. 이 문화재는 삼국시대 말 탄 무사와 말갖춤 복원에 중요한 기준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밖에 경주와 대구의 출토지가 분명한 청동기 일괄품 등 한국의 고고학과 미술사학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가 많다. 국은기념실 전시품은 선사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로 각 시대를 아우른다. 선생이 가장 아끼는 도제기마인물상을 비롯해 안계리, 죽동리, 지산동의 청동일괄유물 등 고고학과 미술사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자료가 많다. 대표적인 전시품으로는 도기기마인물형 뿔잔(기마인물형각배, 국보 제275호), 청동옻칠발걸이(보물 제1151호), 오리모양 토기, 경주 죽동리 출토 청동기 일괄품(보물 제1152호), 대구 지산리 일괄 출토품 등의 국가지정문화재를 비롯해 무덤 출토 토기, 장신구, 말갖춤, 그리고 기와, 금동불, 사리장엄구, 각종 금속공예품 등의 다양하고 찬연한 문화재를 감상할 수 있다. 사진: 자료사진은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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