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의 초입에 들어서면, 양 갈래 소나무군상들이 한 폭의 풍경으로 빼꼭하다. 풍파에 시달린 흔적들을 고스란히 안고 가는 위풍당당한 기세다. 휘어지고 뒤틀린 흠집으로도 풍경을 이룬 나무의 자태가 위안을 안겨준다. 길도 나무도 묵은 나이테로 구부정해, 옛 숲에 안겨드는 걸음이 느슨하다. 흙살 펑퍼짐한 휘어진 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면 한량없이 편안해하는 심신이다. 태초의 숲을 거닐듯 무심히 하늘을 쳐다본다. 훤칠한 소나무 키 높이로 빠끔히 내다뵈는 하늘이 솔잎 사이로 푸르다. 최치원 사산비문(四山碑文) 초월산(初月山) 대숭복사 비명(碑銘)에 ‘묘역 둘레에 소나무를 옮겨 심으니 쓸쓸하게 비풍(悲風)이 잦으면, 춤추던 봉황과 노래하던 난새의 생각이 커지지만, 왕성한 기운으로 밝은 해가 드러나면 용이 서리고 범이 걸터앉은 듯 지세(地勢)의 위엄을 더해 줍니다’라는 글귀를 실감하는 대목이다. 【삼국사기】 ‘원성왕(38대, 785~798)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경신이며, 내물왕의 12대손이다. 어머니는 박씨 계오부인이다. 왕비는 김씨이니 신술 각간의 딸이다. 처음 혜공왕(36대, 765~780) 말년에 신하들이 반역하여 발호하였는데, 선덕(37대왕, 780~785)이 상대등이 되어 임금 측근 악당들을 제거할 것을 앞장서서 주장하였다. 경신이 이에 동조하여 반란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 선덕이 왕위에 오르면서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선덕이 후계자 없이 죽자 신하들이 의논 후 왕의 족질 주원을 추대하려 하였다. 그때 주원은 서울 북쪽 20리 되는 곳에 살았는데 홍수가 져서 알천(閼川)을 건너오지 못했다. 누군가가 말했다. “임금 자리는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기에, 오늘 폭우를 내려 하늘의 뜻이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상대등 경신은 전 임금의 아우로서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통을 지녔다”이에 여러 사람들이 의견을 일치하여 왕위를 잇게 하였다. 얼마 후 비가 그치니 백성들이 만세를 불렀다’ 【삼국유사】 ‘이찬(伊湌) 김주원이 수석 재상으로 있을 때 왕은 각간(角干) 차석자리였다. 꿈에 머리에 쓴 복두(幞頭)를 벗고 흰 갓을 쓰고, 열두 줄 가야금을 들고 천궁사(天宮寺)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사람을 시켜 해몽을 하게 했더니, 복두를 벗은 것은 관직을 잃을 징조요, 우물 속으로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징조라고 했다. 해몽을 듣고 몹시 근심하며 두문불출 했다. 이때 아찬(阿湌) 여삼이 뵙기를 청했으나, 왕은 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않았다. 다시 뵙기를 청하자 허락하여 아찬이 물었다. “공께서 꺼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왕은 꿈 해몽 이야기를 자세히 일렀다. 아찬이 일어나서 절하고 말하기를 “좋은 꿈입니다. 공이 왕위에 올라서도 나를 버리지 않는다면 공을 위해서 꿈 풀이를 해보겠습니다.” 왕이 좌우 사람들을 물리치고 꿈 해몽을 청했다. 아찬이 말하기를 “복두를 벗은 것은 그대 위에 앉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요, 흰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요, 열두 줄 가야금을 든 것은 12대손이 왕위를 계승할 징조요, 천궁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궐에 들어갈 상서로운 징조입니다.”라고 해몽했다. 왕이 말하기를 “내 위에 주원이 있는데 어떻게 왕 위에 앉을 수 있단 말이오?” 아찬이 답하기를 “비밀히 북천신(北川神)에게 제사를 지내면 성사될 것입니다” 왕은 아찬의 말에 따랐다. 선덕왕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 사람들은 김주원을 왕으로 삼아 장차 궁으로 맞아들이려 했다. 갑자기 홍수로 냇물이 불어 북천 북쪽에 살던 김주원이 건너오질 못했다. 왕이 먼저 궁에 들어가 왕위에 오르자 대신(大臣)들이 모두 와서 새 임금에게 축하를 드렸다. 원성대왕 성함은 김경신이요, 길몽이 들어맞은 것이다. 김주원은 명주(溟洲)에 (지금의 강릉) 물러가 살았다. 경신이 왕위에 올랐으나 이때 꿈을 해몽한 여산은 이미 사망했기에 그의 자손들을 불러 벼슬을 주었다.’ 【삼국사기⦁삼국유사】 ‘재위 14년 만에 죽으니 유해를 봉덕사 남쪽에서 화장하였다’ ‘원성왕릉이 토함산 서쪽 곡사에 있으며 곡사는 당시에 숭복사라 하였다’ 숭복사에는 최치원이 쓴『사산비문』「대숭복사비」가 남아 있다. 고 했다. 지금 비석이 보이지 않으나 인근 말방리 숭복사 터가 있어 괘릉이 원성왕능이라는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다. 『동경잡기』에 ‘괘릉은 경주부의 동쪽 35리에 있는데, 어느 왕의 능인지 모른다. 전설에 의하면 물속에 장사하고 관을 돌 위에 걸어놓고 흙을 쌓아 능을 만들었기 때문에 괘릉(掛陵)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이런 까닭으로 1936년 이래 사적에 괘릉으로 등록되었다. 1967년 대왕암이 문무왕릉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대숭복사비문」의 해석이 이루어져 원성왕릉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삼산오악조사단의 대왕암 발견 전까지 괘릉엔 문무왕릉 표석이 박혀있었다. 연못이 있던 물구덩이라 널을 땅에 묻지 못하고 돌 위에 걸었다고 해서 걸‘괘(掛)’ 괘릉으로 불리었다. 어느 해 원성왕릉 근무 때 일이다. 전반적 해설이 끝나고 답사객들로 부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널을 어떤 식으로 어떻게 걸었냐?”는 질문이었다. 걸었다는 의미를 필자 생각으로 해석해 본 적이 있다. 필자성장기 집안이 종가(宗家)였다. 다달이 제사를 지내다시피 했다. 산적이나 떡 등 제물을 제기(祭器)에 담을 때 높지막이 동개 얹는데, ‘괸’ 다고 했다. 신라는 불교가 공인된 이후부터 거대한 무덤을 조성해 왕족의 장례를 치르는 관습을 주저했다. 시신을 불태워 산골(散骨)하는 화장제도가 융성했다. 통일 후 지배층이 불교문화를 활성화 시키면서 화장은 장엄한 의식구조로 탈바꿈 되었다. 【삼국사기】 원성왕의 장례는 ‘유언에 따라 관(棺)을 봉덕사 남쪽에 옮겨 화장(火葬)하였다’ 화장 후 산골 의식을 치렀기에 목제(木製) 관이기 보다는 뼈 항아리 골호(骨壺)가 연상된다. 땅을 판 밑바닥에 석판(石板)을 설치하고 그 위에 얹어두는 방식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정을 해본다. 화장용기는 토기나 화강암 돌을 다듬어 큰 용기 안에 작은 용기를 담는 형식이었다. 집 모양 토기를 사용하거나 당삼채(唐三彩) 항아리도 이용했다. 뼈항아리 둘레로 12지상을 새겨 넣은 골호 뼈항아리도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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