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건천읍 조전리에 새롭게 단장한 광산정사(光山精舍)를 들어서면, 사우(祠宇) 상의(尙義)·강당 이선(貳善)·서재 강마(講磨)·삼문 경절(敬節) 등 편액이 눈에 들어온다. 광산정사는 의병장 오산(鰲山:청도)백씨 부암(傅巖) 백이소(白以昭,1557~1597)를 모신 공간으로 훼철된 것을 2011년 후손 백수청(白水晴)씨가 주관해 다시 건립하였다.
「연보」에 의하면, 부암은 가학을 계승하였고, 효경·소학·사략 등을 배우며 학문에 뜻이 깊었다. 26세에 순천김씨 김언광(金彦光)의 따님과 재혼하면서 장인이 사위의 뛰어난 기력을 보고 활 쏘는 법을 익히도록 권면하였다.
30세에 광지산 아래에서 준마를 얻었고, 부암산 아래에 집을 짓고 아우 백이정(白以貞)과 함께 날마다 낮에는 활 쏘는 법을 익히고, 밤에는 경서와 사략을 읽었다. 이후 36세 되던 해에 임진왜란이 발발해 붓을 던지고 집안과 나라를 위해 몸을 던졌다. 특히 왜란 당시 건천 주사산과 열박재 등에서 왜적을 막아 공을 세웠고, 사후 1786년에 유림의 공의로 광산사(光山祠)를 건립하기에 이른다.
『순조실록』에 의하면, 순조 14년(1814) 9월 5일, 예조에서 경외에서 의정부에 장보한 충신ㆍ효자ㆍ열녀에 대해 분등하여 초계하며, 경주의 고(故) 봉사 백이소, 왜변 때 의병을 일으켰다가 정유재란 때 전사한 자로 인해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
그의 행적이 담긴 『부암실기』는 권1의 「연보」와 「문천회맹록」, 권2의 「유사」와 「교지」, 권3의 「축문」과 「묘갈명」 등 총 3권으로 구성되며, 경주 의병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가 된다. 연보는 백수장(白受章), 행장은 조종영(趙鍾永,1771~1829), 묘갈명은 김이익(金履翼,1743~1830), 묘지명은 후손 백수장의 요청으로 치암(癡菴) 남경희(南景羲,1748~1812) 등이 지었다. 병절교위 훈련원 봉사 백공 묘지명(秉節校尉訓鍊院奉事白公墓誌銘) - 치암 남경희 아! 충신이 어느 시대인들 있지 않으리오? 섬 오랑캐의 오랜 전쟁을 당해서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던 신하들은 대부분 도망쳐 숨어 살기를 도모하였지만, 비분강개하여 팔뚝을 걷어붙이고 국가의 위급에 목숨 바치며 비록 죽어서도 후회하지 않던 사람은 바로 초야(草野)에 있었다. 매번 동경야승(東京野乘)을 읽으며 우리 고을에 충의지사가 많다는 것을 탄식하였고, 그 가운데 한 분이 봉사 백이소(白以昭) 공이 있다.
백이소 공의 자는 융원(隆遠)으로, 그의 원조(遠祖)는 당나라 백우경(白宇經)이다. … 증조부는 진사 백구(白球), 조부는 백문절(白文節), 부친은 기자전 참봉 백희(白熹)이고, 모친은 최씨이다. 공은 1577년에 고을 서쪽 부산리(富山里)에서 태어났다.
임진년에 왜적들의 공세가 매우 거세져 바로 수도를 범했고, 남은 무리들은 온 고을을 약탈하였다. 공은 어머니를 산중에 모셔두고 홀로 활을 가지고 적을 막았다. 적 30여급을 참수하니 적들이 감히 산으로 들어오지 못했고, 산중에서 적을 피해 있던 사람들이 덕택으로 모두 온전했다. 공은 기골이 웅걸하고 남보다 특출한 용맹함이 있었기에 노인들은 “부산(富山)의 깎아지른 듯 험준한 그 기운이 실로 이 사람에게 모였다”고 하였다.
갑오년(1594)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봉사가 되었고, 정유년(1597) 적이 다시 쳐들어왔을 때 공은 발분하여 적과 싸우다가 총탄을 맞았다. 영천 창암의 전장으로 달려가고자 할 때 절도사와 고을수령이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만류하였으나, 공은 개연히 “신하가 국난을 당해 전장에서 죽는 것이 당연한데 어찌 살 생각을 하겠는가!”하고 끝내 스스로 군사를 모아 창암 전쟁터로 달려가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였으니, 바로 9월 29일이다. 또 공은 준마가 있었는데 항상 전쟁터에서 그 씩씩한 준마의 도움을 받았다. 종 부기(富基)도 항상 말고삐를 잡고 따랐는데, 이번 전투에도 따라갔다가 군사가 패했어도 달아나지 않고 주인과 말과 함께 죽었으니, 참으로 충신의 노복이라 할만하다.
아! 국가에서 충신을 드러내는 일은 지극하다 말할 수 있고, 임진왜란에 죽은 신하는 전후에 걸쳐 증직(贈職)의 은전을 입고 정려 표창되었으니 무슨 한이겠는가마는 공만이 홀로 빠진 것이 어찌 드러나는 때가 있겠는가? 광산에 신주 모시고 제사 받드는 것은 가히 오랜 세월 의를 사모한 마음이 드러난 것이리라. 공은 순천김씨 김언광의 따님과 혼인해 백운붕(白雲鵬)·백운곤(白雲鵾) 두 아들을 낳았다. … 6세손 백수장이 묘지명문을 나(남경희)에게 부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