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웅과 송가인이라는 가수들을 앞세워 트로트가 우리의 곁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모처럼 트로트 이야기로 글을 시작해볼까 한다. 향가를 연구하다 보면 만엽의 정서와 트로트의 정서가 참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작곡가는 곡으로 역사를 만든다. 현대 작곡가 중 가요사적 의미를 가진 사람 중 하나로 백영호 (1920~2003) 라는 이가 있다. 지난 해가 작곡가 백영호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는 정식 음악교육을 받지못했으면서도 우리나라 대표 작곡가가 되었으니, 응당 1급 천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향가의 대중가요적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작곡가 백영호에 대해 쓴 박사학위 논문을 손에 들고 있다가 뜻밖의 사실에 접하게 되었다. 남녘 지리산 넘어 진주땅에 ‘백영호 기념관’이 있다는 것이다. 지리산 따라 산줄기가 비브라토처럼 꺾인 곳에 백영호가 기념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 그의 아들이 관장직을 맡아 아버지를 기리고 있었다. 독자분들께서 낯설어 하실지 모르겠지만 백영호는 우리나라 가요사에 지리산처럼 솟아있는 음악인이다. ‘동백아가씨’를 만들어 내었고, 이미자에게 주어 트로트를 민족의 노래로 자리잡게 한 주인공이다. 이번 칼럼은 백영호에 대한 논문(‘작곡가 백영호의 작품분석과 가요사적 의미’, 정진)과 ‘나무위키’의 내용을 참고로 해 만들어 보았다. 흙바람이 어둡게 불던 일제 강점기에 우리 음악계는 다양한 외국 음악을 들여와 나라를 빼앗긴 한의 정서에 이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탐색하고 있었다. 그 시절 미국에서 유행하던 폭스 트로트라는 춤곡이 우리 나라를 풍각 손님처럼 찾아왔다. 몇몇 가수들이 큰 히트를 쳤고 망국의 한과 섞여가며 차츰 민족의 심성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음악은 조선 500년을 관류해 오던 전통 음악이 달구지 끄는 늙은 말처럼 뒷심을 발휘하고 있었고, 거기에 신식 음악들이 블랙커피에 설탕 첨가되듯 한 스푼 두 스푼 더해지고 있었다. 차차차, 트위스트 등이 들어와 트로트와 함께 간헐적 힛트로 존재감을 알렸다. 50년대까지만 해도 트로트는 장르조차 되지 못했다. 60년대 이후에야 장르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던 때 음악에 대해서는 공식과정의 교육조차 받지 못한 백영호라는 작곡가가 무대 위로 나왔다. 백영호는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장르의 외국 음악을 섭렵하며 글로벌 음악의 정수를 흡수하고 있었다. 우리 땅에 들어온 외국 음악들은 아직 우리음악의 주류가 되지 못하고, 양념으로만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트로트는 그들과는 다른 길을 걸을 수 있었다. 트로트 분야에서 한 천재가 나와 전통 음악과 신식 음악의 순서를 뒤바꿔버린 가요사적 작업을 해낸 덕분이었다. 백영호가 1964년 ‘동백아가씨’라는 곡을 만들고, 이를 24세의 풋내기 가수였던 이미자에게 주어 취입하게 했다. 그로써 초대형 가수 이미자와 불멸의 힛트곡 동백아가씨가 탄생하게 되었다. 백영호의 동백아가씨는 음악사를 뒤집어 놓았다. 동백아가씨를 앞세워 트로트가 전통가요로 자리 잡는 이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로써 본래 전통음악이던 국악이 주류에서 밀려났고, 트로트가 주류가요로 자리를 잡았다. 미국에서 들어온 낯선 춤곡 폭스 트로트가 민족 감성과 섞이더니, 급기야는 전통음악으로 불리게 되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냈다. 부지불식간 전통이라는 단어의 의미조차 바꾸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남녘 진주 땅 ‘백영호 기념관’에는 음악사의 한 장면을 기념하기 위해 아버지처럼 늙어가는 아들이 도수 높은 안경을 올려 쓰고 찾아온 트로트 손님을 반기고 있었다. 필자가 이번 칼럼에 대중 가요사를 언급한 것은 향가의 역사에도 이와 비슷한 큰 사건이 벌어졌었기 때문이다. 1400여년 전 고대 동북아에서 일어난 향가의 변혁을 데자뷰하여 언급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일본 제일의 만엽연구가 중서진(中西進) 오사카여대 명예교수는 만엽향가가 걸어온 지평선 끝을 바라보다가 그 사건에 대해 다음처럼 말했다. “만엽을 촉발시킨 원동력은 고대 한반도로부터 받은 충격이었다. 만일 나당 연합군과 백제와 왜국이 맞붙은 백촌강 전투가 없었다면 만엽집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 전투로 백제가 멸망하였고, 고관들이 왜국으로 망명한 결과 백제의 문화를 왜국이 계승하는 형식으로 역사가 흘렀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만엽집이다” 중서진 교수의 이 말은 백제인들이 663년 왜국에 들어가 향가문화에 큰 변화를 일으키는 에너지가 되었다는 말이 된다. 일본과 우리는 문화가 흐르는 방향을 두고 툭하면 신경전을 벌인다. 일본은 고대문화가 한반도에서 들어갔다는 사실을 죽어라 묵살하고 있고, 우리는 근대문화가 섬에서 들어왔다는 사실을 결단코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한반도에서 문화가 일본열도로 들어 갔다고 해서 자랑할 것도 없고, 대한민국 사람들이 미국의 폭스 트로트에 뿌리를 둔 노래를 부른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작은 바람에 흔들리는 참새 솜털처럼, 미묘한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 능력인가. 문화는 바람과 같은 것이어서 부채질 하는 자의 것이 아니고 쏘이는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부끄러워 해야 할 것은 받아들이지 않고 덧붙이지 못하고 소비하지 못하는 문화쇄국의 심성이다. 쇄국은 필연적으로 격차를 낳게 되고 격차는 치명적이기까지 하다. 차츰 불편하더라도 답으로 들어갈 때가 되어간다. ‘향가가 한반도에서 북서풍을 타고 들어갔을까 아니면 남동풍을 타고 들어왔을까’라는 질문에 답을 찾아야 한다. 객관적으로는 불리하다. 일본에는 4516개의 향가가 남아 있고, 한반도에는 겨우 25개 남아 있다. 또 향가 연구는 1000여년 전 일본에서 시작되었으나, 우리는 100년도 되지 못한다. 심지어 일본 학자들로부터 해독법을 전수받기까지 했다. 완패다. 그러나 일본의 중서진 교수는 백제 패망의 백촌강 전투가 만엽집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반대로 말하였다. 희망이다. 그러나 3:1로 불리하다. 누가 현해탄에 부채질을 했을까. 우리는 고대 문화가 북서풍을 탔다는데 익숙하다. 필자는 ‘우연’이라는 호롱불을 켜고 박쥐 날아다니는 칠흑의 동굴 속을 답을 찾으려 헤매었다. 그 끝에 한일 모두에게 불편했던 답이 있었으나 대반전이 있었다. 과연 무엇일까?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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