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 이야기이지만 필자는 김해김씨 족보에 따르면 김유신 장군의 62대 손이다. 그의 후손으로서 백제의 패망 장면에 대한 글을 쓸 때마다 왠지 진지한 느낌이 드는 것은 김유신 장군과의 인연 때문일 것이다.
신라의 김유신 장군은 660년 황산벌에서 백제의 계백 장군과 만나게 되었다. 각자는 자기 나라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삼국시대 5만여명의 병력을 모았다는 뜻은 국가가 총동원령을 내려야 가능한 숫자였다. 그 때 김유신은 5만군을 이끌고 있었다.
그러나 백제의 계백은 소수의 결사대로 이에 맞섰다. 5만이어야 하는데도 소수의 결사대만을 끌고 나갔다는 사실은 나당의 기습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을 집결시킬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래도 계백장군이 시간만 끌어주었다면 백제는 군사를 정비해 신라와 당나라의 기습전략을 흔들 수가 있고, 잘하면 망국으로의 길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계백은 얼마 견디지 못한 채 황산벌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이후에야 백제는 군사들을 끌어 모을 수 있었고, 왜국의 지원을 받아 3년간의 전쟁을 계속 할 수 있었다. 최후의 결전은 한반도 서해안에서 벌어진 백촌강(白村江)과 주류성 싸움이었고, 백제와 왜는 여기에서 회복 불가능의 타격을 입고 말았다.
‘이 땅에 더 이상 꽃이 피지 않으리라’
백촌강 패배 후 신라에 흡수될 수 없는 백제인들은 꽃을 가꾸던 땅을 버리고, 현해탄을 건너 왜국으로의 도거(渡去)에 나서기로 했다. 퇴각하는 왜국의 군사들과 항전을 다짐하는 대규모 백제인들을 실은 배가 속속 왜국을 향해 떠나갔다. 현대에 들어 세계 곳곳에서 목격되는 보트 피플과는 비교될 수 없는 대규모 디아스포라의 발생이었다.
혼란스러웠을 배 위에 산상억량(山上憶良, 660-733)이라는 세살박이 아이가 타고 있었다. 아이는 백제 왕실에서 의사를 지냈던 아버지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그들 부자는 한 점의 빛도 허용되지 않는 검은 바다를 건너야 했다.
훗날 일본 만엽집 연구의 제일인자로 알려진 중서진(中西進, 1929~) 오사카여대 명예교수가 그 날의 아이에 주목했다. 중서진 교수는 1969년 <국학원 잡지(만엽집 특집)>에 ‘억량 귀화인론’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의 논문은 다음과 같다.
中西進(1969), 憶良帰化人論 『國學院雜誌(万葉集特輯)』70(11), 國學院大學出版部, pp.267-282. 그는 위 논문에서 ‘산상억량은 660년 백제에서 태어났다. 3살 되던 해 백제가 멸망하였고, 그는 아버지와 함께 왜국으로 건너왔다. 당시 산상억량의 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일본서기 9월 24일 조에 기록되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중서진 교수의 이 논문은 필자에게 백촌강 충격이 일본에 건너간 향가에 던진 충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단서를 주었다. 억량이 가진 독특한 이력은 백제도거인(渡去人)들이 어떻게 일본에 정착하였는지를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만엽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그의 일본국 정착과 살아갔던 과정은 매력적인 연구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필자 역시 그의 작품을 볼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그를 통해 향가의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 때문이다.
일본 도거(渡去) 후 억량이 역사의 문헌에 최초로 등장한 것은 한 만엽가의 저자로서다. 그의 나이 30세 때였다. 세살박이였던 아이가 어느덧 30세로 성장해 만엽의 지평선 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 작품은 34번가다.
白浪乃濱松之枝乃手向草幾代左右二賀年乃經去良武
‘흰 파도가 치는 물가에 소나무 가지들이 풀숲처럼 우거져 있다. 그대의 여러 대 후손들도 좌우로 길에 넘쳐나고 있어라’
산상억량이 천도(川嶋)라는 황자에게 만들어 준 작품이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비교법, 은유법, 생략법 등이 매우 정교하게 구사된 작품이다. 만들어진 시점은 690년 9월로 특정돼 있다. 자손들의 번성을 칭송하고 있는 내용으로 보아 일본 천무천황과 관련된 작품이다. 천무천황은 만엽가에서 자손 많기로 유명한 천황으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지통(持統) 천황은 키(紀伊)국에 행차해 남편 천무천황의 묘를 참배하고 있었다. 천도(川嶋) 황자가 그녀를 수행하면서, 산상억량이 만든 만엽가 하나를 가지고 갔다. 이 사실은 산상억량이 어떤 형태로든 천도황자와 지통천황과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천도황자와 지통천황은 남매간이다. 또한 그들 남매의 아버지 천지천황은 백제 지원을 위해 대규모 군사를 파견했던 연구대상 천황이었다. 그러나 왜국은 백촌강에서 패배했다. 쇼크가 쓰나미처럼 일본에 가해졌다. 수도를 옮겼고, 나라 이름까지도 ‘왜국’에서 ‘일본’으로 바뀔 정도로 후유증이 지속되었다.
백촌강 쇼크로 일본이 흔들리는 가운데 27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 시점에서 산상억량이 포착됐다. 만엽향가 저자와 천황 남매와의 교류라는 두 가지 점이 의미심장하다. 그는 백제 파병을 결단했던 권력자의 후손들과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고, 향가창작 실력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만엽향가라고 해서 백촌강 충격으로부터 완전 자유스러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일본에 건너간 향가의 변화를 알려면 산상억량이 가는 길을 보아야 했다. 만엽에 있어 억량의 길을 따라가 보자. 신라 향가와 일본 향가라는 오누이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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