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엽집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들을 후대의 사람들이 모아놓은 책이다. 4516작품이 실려 있다. 만엽가와 한반도의 관련성에 대해 한일의 연구자들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8번가도 그에 해당한다.
8번가가 만들어 질 때 백제는 신라와 당나라로부터 기습공격을 받고 있었다. 당시 일본의 천황은 제명(齊明)이라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실제의 권력은 중대형(中大兄)이라는 그녀의 아들에게 있었고, 아들은 훗날 어머니 사망 후 천황으로 즉위한다.
극비리 준비되어 왔던 나당 연합군의 공격은 660년 여름 시작되었다. 기본 전략은 속전속결이었다. 7월 9일 서쪽에서는 소정방이 이끄는 13만의 당군이 서해안 기벌포에 상륙해 밀려왔고, 동쪽에서는 김유신이 이끄는 5만 신라군이 결사의 각오로 막아서는 계백을 무너뜨리고 사비성을 향해 달려왔다. 허를 찔린 백제는 허둥지둥했다. 연합군이 수도 사비성을 포위하자,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후퇴했다. 버려진 사비성은 바로 그날 나당군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신라 왕자 법민은 끌려온 백제 왕자 부여융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었다. 7월 18일에는 의자왕이 항복하였다. 당군이 기벌포에 상륙한 날로부터 고작 열흘 만의 일이었다. 짧은 기간에 500여년을 이어오던 백제라는 왕도가 지상에서 지워졌다. 세계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짧은 기간의 함몰이었다.
연합군은 승리를 기념하는 연회를 열었다. 신라 무열왕과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윗자리에 앉아 백제 의자왕을 아랫자리에 앉히고 술을 따라 바치게 했다. 백제의 신하들은 눈물을 흘렸다.
의자왕은 항복한지 1달 보름 후인 9월 3일 1만2807명의 백성들과 함께 당나라 수도로 끌려가기 위해 백마강 하구를 빠져나갔다. 장안에 도착한 의자왕은 11월 1일 당나라 황제에게 항복의 예를 올려야 했다. 그리고 며칠 뒤 의자왕은 그곳에서 병사하였고, 북망산에 묻혔다. 대한민국 부여시가 그의 무덤을 찾았으나 아직 찾지 못하고 있고, 1995년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 그의 가묘를 설치하여 두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왜국이 이 전쟁에 참여를 결정하였다. 고구려만 빼고, 동북아 4개국 전체가 얽혀 든 것이다. 고구려는 빠지면 안전할 줄 알았겠으나, 몇 년 후 그 역시 망했으니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마찬가지 팔자였다.
제명 천황은 661년 1월 6일 나니와(難波, 지금의 오사카)에서 배를 타고 츠쿠시(筑紫, 지금의 후쿠오카)를 향해 서정(西征)의 길에 나섰다. 그 배 위에 8번가의 작자 액전왕(額田王)이 타고 있었다. 참전이라는 국가의 의사결정이 실행되던 예민한 시기에 액전왕은 일본 권력의 최고 핵심부 인사들과 함께 최근접 거리에서 동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천황 일행의 배는 서진을 계속하다가 중간쯤인 시코쿠(四國)의 한 나루터에 일시 정박하였다. 그리고 그날 그 나루터에서 문제의 만엽 8번가를 만든 것이다. 시기적 공교로움으로 인해 8번가는 한반도와 관련 지어질 수 있다고 본다. 그러하기에 8번가는 절제를 거듭하며 해독되어야 할 것이다.
8번가에 나타나는 ‘떠나는 임’을 누구로 보아야 할까. 이것이 해독의 하이라이트라는 것쯤은 독자 여러분께서도 알아차리실 수 있을 것이다. 떠나는 임이 누구인지 판단을 내리는데 도움을 줄 일련의 사실들은 다음과 같이 추려졌다.
① 본 작품은 눈물가다. ② 숙전(熟田)은 백제를 의미한다. ③ 떠나는 임의 신분은 왕이었다. ④ 당시 동북아에서 사망한 왕으로는 의자왕이 있다. ⑤ 의자왕의 사망으로부터 본 작품 창작까지의 기간은 두 달 열흘 정도였다. 이 기간은 의자왕 사망의 급보가 장안에서 한반도로, 한반도에서 왜국으로 전파될 수 있는 기간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경주신문 독자분들께서는 이러한 요건을 갖춘 사람이 누구일지 나름 판단이 서실 것이다. 필자도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떠나는 임이 백제 의자왕이라는 강한 심증을 갖고 있다.
그 시점 의자왕 사망 소식은 숨을 몰아쉬며 일본으로 달려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날 시코쿠(四國) 나루터에서 왜국의 수뇌부에게 의자왕 사망이라는 급보가 전달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했기에 그들은 의자왕이 편안히 저승에 갈 수 있도록 제의 행위로서의 만엽가를 공연했을 것이다.
작품을 둘러 싼 외부 상황은 이렇게 조립된다. 이제는 내용까지도 이러한 상황에 부합되는지 점검해보아야 할 것이다. 제명천황 등 왜국 최고 수뇌부의 정서에도 내용이 부합되는지 맞추어 보아야 한다. 그 결과 내용 역시 어긋나지 않았다. 천황과 액전왕이라는 두 여인의 마음이 전달됨은 물론 출정길 다른 수뇌부의 심경과도 배치되지 않는다. 8번가에 의자왕을 직접적으로 대입하면 다음과 같이 최종 해독된다.
“그대께서 백제(熟田)의 나루터에서 배에 오르셨다. 삼십 인의 저승 무사들이여, 의자왕을 모시어라. 저승배의 사공들이 달 떠오르기를 기다리는데 밀물이 나란히 소(沼)로 밀려들어오는구나. 이제 편안히 저승에 가오시라. 이영차, 힘차게 기예를 펼치거라”
의자왕이 죽었어도 역사의 급류에는 꽃이 계속해 떨어졌다. 의자왕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던 제명천황은 이때로부터 7개월 후 사망하였다. 2년 후에는 제명천황의 아들 중대형 황자가 군사 2만 7천 명과 400여척의 함선을 전선에 투입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백촌강(白村江) 전투에서 당나라 수군에 대패하여 서해 바다를 붉게 물들였다. 663년 9월 백제 부흥군은 주류성(周留城) 결전에서도 무너지고 말았다. 이를 끝으로 백제의 명이 끊어졌다.
왜국과 백제의 연결고리도 끊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백제를 전설로 남기고 왜국으로의 도거(渡去)에 나섰다. 대규모의 사람만 넘어간 게 아니라 문화도 해협을 건넜다. 파괴적이었다. 백촌강의 충격파는 무시무시했다. 기존의 질서를 파괴했다. 대형 파충류가 운석의 충돌로 멸종하고, 포유류의 시대가 온 것과 같은 현상이 열도에서도 벌어졌다. 몇 년 후 정변이 일어나고, 일련의 파괴 끝에 왜국(倭國)이란 국호까지도 사라졌다. 그리고 새로운 것들이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일본국이라는 새로운 국명이 나타나고, 일본서기와 고사기라는 역사서도 최초로 발간되었다.
멸종과 진화의 섭리에서 향가문화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오누이는 해협의 양쪽으로 갈라져야 했다. 열도의 연약한 누이는 어떠한 운명을 맞이할 것인가.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