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경주의병장으로 도대장 김호(金虎)장군, 운암 최봉천과 동호 이방린 등 무수히 많은 인물들이 경주 곳곳에 붓을 던지고 의를 행하였다. 집안과 가문 그리고 후손과 후학들이 지금도 이들의 넋을 기리고 지난날의 행적을 쫓고 있다.
경주 양북출신의 김해김씨 동엄(東广) 김득복(金得福,1561~1626)과 동오(東塢) 김득상(金得祥,1565~1598) 의병장은 형제지간으로 문천회맹(蚊川會盟) 등 경주지역 임란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조부 김을동(金乙棟), 부친 김문(金汶)과 모친 안동김씨 김은(金銀)의 따님의 소생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무예와 학문에 출중하였고, 지역 인사들과 두루 교유하였으며, 전란에서 경주를 구한 장본인이다.
동엄은 임진왜란이 발발해 낙의재((樂義齋) 이눌(李訥) 등과 경주 불국사와 금오산[남산] 그리고 영천 등에서 큰 활약을 하였고 문천회맹·구강회맹·공산회맹 등에 참가하였다. 특히 임란 당시 경주진에서는 오의정(五宜亭) 이의온(李宜溫,1577~1636)과 김득복이 부윤의 추천으로 이순신의 막하에 들어가 활동하였으며, 이에 동엄은 1597년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오르고, 이어서 선무원종(宣武原從) 1등 공신에 적록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슬하에 김효원(金孝元)과 김효남(金孝南) 두 아들 역시 선무종원 2등 공신에 녹훈되었다. 『동엄실기』가 국역되어 전하고, 수록된 종군록(從軍錄)은 그의 행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며, 특히 「비격진천뢰철환영(飛擊震天雷鐵丸影)」에 수록된 내용은 화포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된다. 신도비는 외동읍 신계리에 있으며, 신계리는 경주와 울산의 접경지로 문화의 소통창구였으며, 예로부터 경주김씨 경암(敬菴) 김응춘(金應春,1547~1608) 등 많은 의사(義士)가 배출된 고장이다.
동오는 형 동엄을 따라 의병이 되었고, 병법과 전술에 밝아 지형지물을 이용한 진지구축에 뛰어남이 있었다. 권응수장군 휘하에 들어가 공을 세웠지만, 아쉽게도 1598년 월성 동문 밖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며, 1605년에 선무원종 2등 공신에 녹훈되었다.
동엄·동오 두 형제는 오로지 선비는 충의(忠義)를 가슴에 품고 죽을 각오로 싸우는 용사(勇士)의 뜻을 잇고, 임금과 하늘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왜란 당시 이들의 충정(衷情)이 의병의 사기를 고취시켰고, 암서(巖棲) 조긍섭(曺兢燮,1873~1933)이 지은 유허비가 지난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절제사 김공 유허비(節制使金公遺墟碑) 무오(戊午,1918) 가의대부(嘉義大夫) 행 임치진절제사(臨淄鎭節制使) 삼남영장(三南領將) 김득복(金得福,1561~1626) 공은 자가 수중(綏仲)으로, 선계(先系)는 가락(駕洛)에서 나왔고, 뒤에 경주사람이 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여 용맹함을 의병에서 떨쳤으며, 무의공(武毅公) 박의장(朴毅長)ㆍ충의공(忠毅公) 권응수(權應銖)ㆍ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종사하였다. 늘 먼저 전장에 나가 적을 죽이고 사로잡는 일이 많아서 대리(大吏)가 포문(褒聞)해서 상[호뢰(犒賚)]을 내리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錄勳)되었으며, 마침내 절월(節鉞)을 내리고 금자(金紫:벼슬)를 받고 일생을 마쳤다.
공의 동생 김득상(金得祥,1565~1598) 공은 자가 인중(麟仲)으로, 김득복 공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며, 무술년(1598) 경주 동문(東門)의 전투에서 전사하였고, 역시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지금까지 십수대 동안 자손들이 때로는 적다가 때로는 떨쳐 일어나기도 하였고, 그 사적이 유록(遺錄)과 동시대 장사(將士)들의 기록에 드러난 것이 때로는 상세하고 때로는 소략하였다. 그러나 그 충의와 용렬한 기개는 오히려 글 사이에 생생히 드러나니 가릴 수가 없도다.
지금 경주 동해면(東海面) 어일남동(魚日南洞)은 공의 형제가 태어난 곳으로, 대대로 전하는 기이한 행적이 많은 곳이다. 후손 아무개 등이 그 옛터를 차마 그대로 둘 수가 없어서, 돌을 깎아서 기록하고자 멀리 나[조긍섭]에게 글을 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