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하루를 불안감으로 조이는 코로나 뉴스가 한 해의 연말을 들썩이고 있다. 예방행동수칙 방역강화에 사회적 거리두기 등 총력을 가해도 신규 확진자 수가 증가하는 추세다. 기승을 부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질환을 예방하기 위한 전 세계의 항체의약품 백신 개발이 속도를 내고 있다. 절실한 인류의 바람이 대처방안을 찾아내, 온 세상이 평화의 캐롤송으로 맞이하는 송년이길 간절히 기도 한다. 그 옛날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적군이 침범하는 국난을 당해 자결을 강요당했다. 넋을 잃고 공포에 떨었을 백성들의 통곡이 나라 안을 에워쌌을 것이다. 천년이 지난 세월, 예고 없이 닥친 2020년 코로나 사태로 국민들은 불안해하고 있다. 그 당시 쳐들어오는 적군을 막지 못한 왕의 심정은 비할 데 없이 처참했으리. 지금까지 사치와 향락으로 신라 멸망의 상징인 양 알려진 포석정을 현대 학자들은 재조명하고 있다. 포석정지는 역사의 기록을 곰곰이 새겨보았을 때 신라인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기 때문이다. 조영시기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포석정은 『화랑세기(花郞世紀)』『각간선생실기(角干先生實記)』에 포석사⦁충렬사의 기록을 근거로 6~7세기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 성덕왕(702~737)때 김대문(金大問)이 지은 『화랑세기(花郞世紀)』 필사본, 이종욱 역주해 기록을 읽어보면, 8세 문노(文弩)조 606년 문노가 세상을 떠나자 포석사에 화상을 모시고, 신궁의 선단(仙壇)에서 대제를 지냈다. 12세 보리공(菩利公)조 계사년(573) 생이고 신해년(591)에 화랑주가 되었다. 포사(鮑祠)에서 보리공과 만룡은 길례를 올렸다. 18세 풍월주 춘추공(春秋公)조 춘추공은 문희(姬)와 포석사에서 길례를 행했다.『각간선생실기』 문무왕(661~681)때 호석정(弧石亭) 아래에 충렬사(忠烈祠)를 세워 박제상⦁김찬덕⦁김해론⦁김흠운⦁설경두⦁김품석⦁황관창⦁김반굴⦁온군해⦁김의문⦁죽죽⦁추항⦁용석⦁예파⦁부과 등 향제하고 일등(一等)을 증급(增級)하여 그들을 포장(襃獎)하였다. 문무왕 때 당나라 사신이 왔다. 왕이 명하여 호석정에서 잔치를 열었다. 당나라 사신은 성미가 거만하고 오만하여 신라의 여러 신하를 보자 경례를 하지 않았다. 이 때 김유신은 축선사에 있었다. 왕이 김유신에게 잔치에 참석하길 명하니 부하를 거느리고 그곳에 갔다. 당나라 사신은 그를 보자 급히 의자에서 내려와 절을 하며 맞이했다. 그리고 말하기를 남유진성(南維鎭星)을 오래 못 보았는데, 지금 여기 계시니 개국공(開國公)이 아니 십니까 하고는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위의 기록들은 문무왕 때인 7세기 후반의 기록이다. 유동훈은 포석정이 주로 왕의 연회 목적으로 이용된 점을 고려했을 때 신라가 삼국을 완전히 통일한 직전이나 직후 즉, 안압지(동궁과 월지)의 건설연대와 거의 비슷한 시기로 추측했다. 윤경렬은 묘하게 흘러가는 가락의 아름다움과 돌을 뜻대로 다루는 정교한 솜씨를 볼 수 있으니, 신라예술이 가장 왕성하던 때를 지나 조각기술이 무르익어 가던 9세기 초반으로 믿어진다 하였다. 박흥국은 헌강왕과 남산신의 기록으로 보아, 9세기 전반 이전으로 보았다. 홍사준은 신라말의 문인 최광유의 ⌜포석정주악사⌟가 경문왕(861~875) 때 포석정에서 읊은 것이라면, 포석정은 경문왕 재위 이전에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헌강왕대에 당에서 그 제도를 받아들여 남산 서쪽의 후궁⦁이궁의 원내에 연회의 장소로서 포석정을 결구한 것으로 추측하였다. 1998년 실시된 부지 시굴조사 때 6세기말~7세기 토기편이 출토되고, 포석(砲石)명 기와 출토가 연대를 입증하는 추세다. 포석정지는 신라 왕실의 별궁으로 역대 임금들이 연회를 베풀던 곳이기도 하다. 흥청망청 즐기는 무례한 풍습이 아닐 것이다. 왕족이나 귀족들이 나라의 안녕을 위해 제사를 지낸 뒤 음복하며 즐기는 놀이로 짐작을 해본다. 전복 모양의 유상곡수연 잔잔히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그 잔이 자기 앞에 멈추면 한 모금 음미하고, 향가를 읊는 품격 높은 한 장면으로 그려진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세상 마찬가지다. 옛사람들도 잠시 일터를 떠나 경관이 수려한 별장에서 풍악을 연주하며 심신의 정서를 도모했을 것이다. 임금님은 성지인 남산성을 순시하고 나라를 위해 애쓰는 충신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잔치를 포석정에서 베풀었을 것이다. 기품 있는 문화로 삶을 재충전하는 쉼의 공간이 필요했으리라 여겨진다. 신라시대 사용한 술과 술잔이 궁금해 고인이 된 경주문화원 김태중(金泰中1931~2015)원장께 여쭈었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 찹쌀은 귀한 곡식이라, ‘조’로 술을 빚지 않았을까 추정했다. 술잔은 물에 뜰 수 있는 나무로 만든 참새 모양의 목칠기잔(천마총 출토유물로 볼 수 있다)을 사료했다. 얇게 두들겨 펴 가볍게 만든 황금술잔은 나무받침 위에 얹어 띄웠을 것으로 추정했다. 포석정 유배거는 문헌기록과 학자들의 견해에 즈음하여 8~9세기로 추정한다. 맑은 물이 흐르는 포석계곡에서 계욕(禊浴)을 하고 조상과 남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임을 짐작케 한다. 대신들과 국사를 의논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화랑과 충신 등 호국영령들의 명복을 빌었던 사당(祠堂)이기도 하다. 조선말기에 사라진 포석정유상곡수연 입수부 돌거북의 입을 통해 물이 흘러나왔을 것이다. 화강석 돌 홈으로 흘러들게 한 물줄기는 윤을곡 계곡으로 잠시 오르면, 아담한 배상지(杯觴池) 제방이 보인다. 배동(拜洞)에서 태어나 아들 딸 낳고 80여년 동네주민인 ‘포석언니’로 호칭되는 필자의 고종사촌은, 날이 가물면 저수지밑바닥이 훤히 들어난다고 했다. 그리고 포석정지 군데군데 감나무 터는 마을주민이 살던 집터라고 했다. 부근에 있던 신라시대 석조를 옮겨와 덮어둔 우물은 살던 주민들의 식수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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