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를 눈물겹도록 그리워했습니다. 나의 한국행은 곧 경주행입니다. 내 삶은 언제나 경주에서 출발하고 경주로 되돌아오곤 합니다. 그래서 나의 원점은 경주입니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한국의 사회정치적 변혁기 등을 목격한 가장 주목해야 할 재미작가가 고향 경주를 찾았다. 회화, 조각, 직물, 도자기, 설치 미술에서 다양한 매체를 자유롭게 사용하며 복합적이고 다양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최일단(崔一丹·84) 화백이 그 주인공이다.
머리와 가슴, 손과 발로 빚어낸 열정 가득한 노년의 대가는 평온해 보였다. 미술평론가 이규일은 최일단 화백의 미술 세계를 ‘발바닥 예술가의 전천후 미술’이라고 요약한 바 있다. ‘아프리카만 빼고 대강 다녔노라’는 최 화백은 오랜 세월 예술을 위해서라면 세상 어느 곳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간 지난 시간들이 서예, 조각, 회화, 공예 등에서 망라된다. 그러나 이 대가는 완성의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 “매일 스타트 합니다. 죽는 순간까지 꽉 채우는 것이지 구멍이 나거나 기포가 있는 일은 하기 싫어요”라면서 평생 해 온 화업과 화가라는 소리도 듣기 거북할 정도라며 몸을 낮춘다.
최 화백은 자신의 화업과 작품에 대해 집안에 유전(遺傳)해 온 ‘문기(文氣)’에서 연유함을 여러 번 강조했다. 최 화백은 구한말 과거제 폐지 직전, 문과에 급제한 수헌(修軒) 최현필(崔鉉弼) 선생의 후손이다. 그래서일까. 화백에게서도 한일병합 격동기 경주에서 선비의 지조와 유학적 전통을 지킨 수헌 선생 집안의 결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84세라는 연륜에도 진술에 능숙한 목소리는 뚜렷하고 명쾌했다. 도야(陶冶)한 대가의 영감의 발원지가 경주라는 대목에선 왠지 모를 자부심마저 느꼈다. 옹색한 지면에 최일단 화백의 화업을 소략할 수밖에 없음은 송구스럽기 짝이 없지만 선생과의 인터뷰는 무척 행복했다. 뉴욕을 떠나 2주간 자가격리 기간을 거쳐 이곳 경주에 온 최일단 화백과의 만남이 성탄절 선물마냥 이뤄졌다. 행운이었다.
-“집안에 유전해 오던 수헌 최현필 선생과 그 후손들의 문기(文氣) 이어받은 것과 ‘경주’라는 유산 있어 언제나 행복합니다” “경주와 비교 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중국 3대 석굴을 다 준다고 해도 석굴암과 바꾸지 않을 만큼 훌륭합니다. 6학년 겨울방학때까지 경주에서 보낸 내 삶은 언제나 경주에서 출발하고 경주로 되돌아가곤 합니다”
안압지에서 그림을 그린 기억, 첫사랑이던 담임선생님에 대한 기억, 종일 걸렸던 석굴암 가는 길, 김유신 장군묘 가는 길, 경주박물관(현 경주문화원) 찾던 일 등을 기억 저편에서 소환해 내는 선생의 얼굴엔 연신 미소가 가시지 않는다.
“교육관이 남달랐으며 은행장이셨던 선친의 낭만적 유산이라는 자양분에다 ‘경주’라는 유산이 있어 언제든지 저는 행복합니다”
최 화백은 어린 시절 편견과 불평등 없었던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집안에 유전해 오던 수헌 선생과 수헌 선생의 초서를 읽기 쉬운 필체로 바꿔 써 모두 8권으로 묶었던 후손 최영우 선생, 늘 책상에 앉아서 수헌 선생의 글들을 직접 필사하면서 수헌문집 발간을 주간한 후손 최상협 선생 등의 문기를 이어받은 것이 오늘의 자신이라고 했다.
“집에도 늘 지필묵(紙筆墨)이 놓아져 있었습니다. 그런 자산들이 제 척추뼈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기억들은 모두 경주라는 큰 유산에 기반합니다”
-“이응노 화백은 나의 스승이자,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분” 최일단 화백은 1936년 출생으로 어린 시절 선친의 고향 경주에서 자랐다. 계림국민학교 6학년일때 서울로 이주해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미대 회화과(서양화)에 입학하였으나 조각과로 옮겨 김종영 선생에게 배우며 1960년 졸업한다. 1958년 국전(조각부문) 특선을 수상했고 10여 년의 교편생활을 거쳐 1968년 베트남으로 이주했다가 미국으로 가려던 도중, 프랑스에 살고 있던 고암 이응노 선생을 찾아간다. 이응노 선생은 최 화백의 재능을 간파했고 당시 고암 선생의 조언을 평생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한다.
“‘너는 재주를 타고났다. 그 재능을 마치 만들어서 가진 재주인줄 알고 갈고 닦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다. 타고 난 재주는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며 내팽개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에게서 일생 누구에게도 듣지 못한 말씀을 들었어요”
1972~1975년 스승의 말에 대오각성해 미국행은 연기되었고 이응로 선생 문하에서 3년여 동안 수학한다. 이로써 동양화에 본격적으로 처음 입문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고암으로부터 세계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배웠으며 이를 기반으로 특유의 여성적 섬세함이 나타나는 동양적 공간을 구축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지 조각에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린 후 한 땀씩 실로 꿰맨 그의 작품은 글씨와 그림, 회화와 조각을 오가며 실험적인 방식으로 동양화의 영역을 넓힌다. 파리에서 세계관이 달라졌고 더 큰 동양화의 세계로 진입하고 싶었다. 중국 갈 생각을 파리에서 결심한 연유다. 이어 1986년~88년 중국 북경중앙미술학원 산수화계에서 유학한다. 이응로 선생 이외에도 서세옥, 김종영, 장욱진 선생 등 당대 최고의 스승에게서 사사 받는다.
서울, 캐나다 몬트리올, 미국 뉴욕 등지에서 여러 번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수 차례 그룹전을 가졌다. 유럽과 미주· 동남아· 소련· 중국 등 고대 문화예술 유적지를 탐방하였으며 특히 중국은 일곱 번이나 방문해 1991년 ‘발바닥 문화예술기행-정중동(靜中動)’ 출간했다. 1992년 소장전 ‘중국 묘족(苗族) 복식전’, ‘1993년 중국 조선족 화가 한낙연 유작전’ 유치, 2005년 이응노미술관개관 5주년기념 첫 외부작가 초대전, 2013년 뉴욕문화원 갤러리코리아에서 ‘채색된 시간: 재미한인작가 아카이브 1부 1955∼1989’전, 2014년 뉴욕한국문화원 갤러리 코리아에서 한인여성미술가 15인 특별기획전, 2019년 중국 베이징에서 한국현대수묵전 등 개인전 및 단체전에 다수 참여하고 있다. 저서로 『최일단발바닥 문화예술기행 정·중·동』이 있으며 2018년 이응노미술관에 후원금 1000만원을 전달하기도 했다. 현재 연중 한 두 번은 뉴욕 등지에서 전시에 참여하며 뉴욕에서 활동 중이다.
-‘최일단발바닥 문화예술기행 정(靜)·중(中)·동(動)’ 3권 발간...5천매의 원고, 고행 같은 기행의 추억 현장감 있게 담겨져 ‘최일단발바닥 문화예술기행 정(靜)·중(中)·동(動) 3권(융성출판, 1991)’은 기행문집이자 견문록이다. 중국 전 지역 문화 유적지를 비롯해 세계 여러 곳을 돌아보면서 스케치한 풍물, 문화예술에 관한 사진자료다. 대가들의 작품을 보면서 느낀 갈등과 환희, 문화예술에 관한 사진자료집들을 모아 엮어냈다. 그렇게 세상을 탐색한 것이 몇 만리나 되었고 이는 5천매의 원고로 집대성됐다. 몇 만장의 사진작업도 함께였다. 천하를 여행하며 얻은 견문과 수집한 자료는 소동파가 간파한 ‘독만권서(讀萬卷書, 만 권의 책을 읽고) 행만리로(行萬里路, 만 리를 여행하라)’에 닿아있다. 열정에 가득찬 이 작업은 필사적인 노력 끝에 탄생한 집필이었다. 이 원고와 자료를 혼자서 수집정리하는데 무려 5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래서 선생이 여행가요, 저술가의 면모도 보이는 대목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디서든 늘 끄적거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노트마다 모아둔 기록이 있었는데 1988년 ‘수헌 문집’ 발간 소식을 듣고서 저도 책으로 엮어야겠다고 생각했죠. 이 책 발간도 나 혼자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조상들이 함께 한 것입니다”
-‘통섭(通涉)’이 가장 큰 줄기...“제 일생을 투과해 나온 작품들을 굳이 한 장르에 국한시키지 않습니다” “저는 이화여자대학교 최재천 석좌교수가 도입인용한 ‘통섭(通涉, 지식의 융합, 사물에 널리 통함)’ 이론을 너무 좋아합니다. 어떤 것이든 섭렵하는 것이 통섭이라면, 대학2년 조각가로 전과 한 것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라고 자신합니다. 조각과로 전과 하면서도 서양미술 전체를 동양화의 거름으로 써서 크게 밭을 갈아엎을 작정이었습니다. 통섭이 제가 하는 일의 가장 큰 줄기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실, 선생은 통섭이라는 개념이 도입되기 전부터 일찌감치, 범예술적 접근을 지향해왔다. 개척자적 자세였다. 새로운 장르를 창출해 내는 다이내믹한 과정을 즐겼던 것이다.
여전히 선생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수년전부터는 세라믹(도자기) 작업에도 몰두한다. 회화 근작들은 주로 동양화의 가장 근본적인 지필묵 세 점을 사용한다. 지필묵이라는 근원적인 조건과 도구만으로 색이나 형태, 형식에 전혀 의지하지 않기로 하는 것이다.
“느린 걸음으로 쉬지 않고 붓질을 하면서 마드리드에서 콜도바로, 돈황에서 이스탄불로, 대족(大足)에서 석굴암으로, 이집트에서 경주로 정신없이 뻗어나갑니다. 이렇게 밖으로 흩어지는 생각을 단순화하고 휘어잡기도 합니다. 나의 예술은 나의 삶입니다. 석굴암에서 그리스 조각의 향취를, 이집트 신전의 기둥 꼭대기 장식에서 신라와당을 연상하며 감동받습니다. 사람들은 내 작품을 놓고 장르를 넘나든다고 합니다만 결과만 놓고 한 분류일 뿐 내게는 장르 개념 즉 회화니 조각, 공예 등이 아예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선생의 통섭을 통한 다면성에 탄복한다.
그래서 허병렬 뉴욕한국학교 교장은 ‘선생이 지니는 깊이와 넓이, 다채로움을 아직도 헤아릴 수 없다. 그래서 영역을 알 수 없노라’고 했다.
-사진/ 신광사진관 김상범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