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 수많은 의병장들이 활약하였고, 곳곳에 그들의 넋을 숭모하는 사당이 건립되었지만, 아쉽게도 주요 관광지가 아니라는 이유로 찾는 이의 발길은 한산하다. 찬바람이 부는 어느 날, 천북 소재의 성남서사를 찾아 차를 타고 골목 곳곳을 누비며 지난 행적을 쫓았다. 경주시 천북면 성지리에 위치한 성남서사(聲南書社)는 의병장 운암(耘庵) 최봉천(崔奉天,1564~1597)을 모신 공간으로 경주의 의기(義氣)가 서린 곳이다. 1789년 약남(藥南) 이헌락(李憲洛,1718~1791)이 지은 행장을 참고하면, 황오리에서 태어난 운암은 어려서 재종형 최신린(崔臣隣)에게 글을 배웠고, 15세(1578)에 향시에서 장원하였다. 1585년 22세 때에 아들 최계량(崔繼良)이 태어나고, 군위에 있는 남계서당에서 예조판서 서애 류성룡을 찾아가 만났으며, 견위수명(見危授命)의 말씀을 마음에 새겼다. 1588년 무과 별시에 합격하였으며, 종종 이태립(李台立)·김석견(金石堅)·백이소(白以昭) 등과 함께 무예를 익혔다고 기록한다. 대마도주 평의지(平義智)가 부산에 와서 일본이 장차 변란을 일으킬 것이라 하여 온 나라가 소란하자, 운암은 경주부윤에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방비의 글을 올렸다. 29세 때 왜란이 발발하자 붓을 던지고 4살 아래인 조카 최진립(崔震立,1568~1636)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며, 경주성 탈환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최계종(崔繼宗) 등과 함께 문천회맹에도 참가하였다. 항상 선봉에 나서 타인의 귀감이 되었으며, 전술전략이 빼어나 공을 세웠다. 1594년에 선략장군 훈련원첨정, 1595년 경상좌도 수군우후, 1596년 절충장군 경상좌도 수군우후 등을 지냈으며, 1597년 34세 되던 정유재란 때에 또다시 의병을 모아 싸우다가 백이소 등과 영천 창암진(倉巖陣)에서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사후 1605년 선조 38년 4월 16일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녹권(錄券)되었고, 4월 26일에는 부모에게 2품의 관직이 내려졌으며, 1607년에 아들 최계량에게 벼슬이 내려졌다. 세월이 흘러 1821년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증직되고, 불천위(不遷位) 제사를 모시는 사당 부조묘가 세워졌으며, 1984년 부조묘 오른쪽에 성남서사를 창건하기에 이른다. 이에 후손들은 화재로 소실된 운암의 사적을 다시 모아서 『운암실기』를 편찬하였는데, 1959년에 권상규가 서문을, 최영우가 발문을 지었으며, 운암의 12대손 최해구(崔海九) 그리고 최세목(崔世睦)·최수민(崔壽民) 등이 힘써 도왔다. 성남서사 사우(祠宇)에는 상충사(尙忠祠), 강당은 경의당(景義堂) 그리고 추모정(追慕亭)·유정재(由正齋)·탁충문(卓忠門)·덕수재(德修齋)·진경재(愼敬齋)·한탁헌(澣濯軒) 등이 있다. 현재는 찾는 이가 드물고 의병정신의 혈기는 퇴색된 채 세월의 무상함만 가득할 뿐이다. 운암의 신주를 모신 부조묘는 경주의 자랑이며, 후세에게 전해져야 할 소중한 정신문화 공간이지만, 아직까지 운암에 대한 연구가 미비한 실정이다. 다만, 공의 7대손 최주곤(崔柱崑)이 묘지명을, 귀연(歸淵) 김근순(金近淳,1772~?)이 묘지명을, 운산(雲山) 이휘재(李彙載,1795~1875)가 묘갈명 등을 지으며, 그의 자취를 남겼다. 운암은 왜군이 쳐들어 왔을 때 요충지를 지킬 책무는 없었지만, 선비의 도리를 지킨 절의(節義)의 인물로, 문무를 겸비하며 선비가 나아가야 할 길을 스스로 개척하였고, 가문과 지역사회 그리고 나아가 나라를 위하는 우국충정(憂國衷情)을 실천하였다. 한문학자 이가원(李家源,1917~2000)선생은 1986년에 성남서사 기문을 지으며, “공의 12대손 최해구가 선대의 지극한 정성을 드러내고, 집안 어르신의 뜻을 계승하는 것에 감동하였다.”라며 후손 최해구·최문철·최수순 등의 노력을 치하하였다. 『운암실기』 중에서~ *운암실기 간행위원회 정유재란 2월에 운암은 경상좌도 수군우후의 직위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있었다. 왜구는 다시 14만 대군을 이끌고 거제도와 서생포 등으로 침입해오자, 수군통제사 원균은 패하여 죽고, 여러 고을 사람들은 왜구의 풍문만 듣고도 도망하여 숨었다. 승세를 올린 왜구는 7월에 총공세를 펼친 끝에 경상도와 전라도를 점령하였다. 당시 왜장 가등청정(加籐淸正,가토 기요마사)과 부장 희팔(喜八)은 군위-신령-영천-안강-경주 등을 거쳐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마침내 9월에 영천 창암에서 경주와 영천 등의 관군과 의병들이 연합하여 일대 총격전을 벌였다. 당시 아군의 숫자는 적고 왜군이 월등히 많았다. 이 전투에서 운암과 백이소의 활약이 크게 두드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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