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에 찌들려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는 시국이다. 작품들을 보는 순간 갑갑했던 심신을 무장해제 시키며 잔잔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전시가 있어 화제다.
5년 만에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이태희(72) 화백이 ‘꿈에서 꿈이로다’ 라는 전시명으로 ‘갤러리 화(龢, 경주시 원화로 344)’에서 2021년 1월 16일까지 초대전을 가지는 것이다.
경주 출신인 이태희 화백은 화가로서 세상의 지명도와 동시대의 미술조류에 연연치 않거니와 기존의 제작방식과 표현법에 대한 도전정신이 강한 천생 화가다.
그간 이 화백의 독특한 기법은 어떤 유수 작품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그만의 새로운 구도적 표현 양식이었다. 전통한지와 천연색료, 밀랍의 오묘한 조화에서 탄생된 신비한 색감과 한국적 정서의 작품에서 그러했고 크레용만으로 새로운 작업을 시도했던 것은 그의 작품에서만 감상할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더욱 편안해진 화풍으로 돌아온 이 화백이 선보이는 정성스런 작품들 16점은 모두 미공개작으로 이번에 첫 선을 보인다.
이번 작품들을 보노라면 마치 피안의 세계에 와 있는 듯하다. 삶의 이치와 번뇌에의 승화가 조용한 미소로 번지곤 한다. 화가의 시선을 따라 어느덧 자유로운 풍탁이 되었다가, 오로라를 타고 흐르는 별빛이 되었다가 마침내는 그윽한 한바탕 꿈을 꾼다.
그 피안의 세계에서 우리는 곧 그것이 꿈이었음을 깨닫고 다시 현실로 복귀하게 된다. 작품들을 보기 전 복잡한 일상을 위로받으며 한결 편안하고 가벼운 복귀를 하게 한다. 힘들었던 것만큼 이 화백이 건네는 위로는 더욱 크게 와 닿기에.
경주의 화단과 현재 지역미술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흐름에 대해선 진지하고 신랄했던 이 화백은, 그러나 시종 ‘피터팬’을 떠올리게 했다. 문턱을 낮춘 갤러리 화(龢)에서 이 화백을 만났다.
-세속의 번잡함 끊어버린 과감한 탈속성 돋보이는 미공개작 첫 선... “공개되는 그 순간부터 작품은 이제 제가 평가할 영역이 아닙니다. 온전히 관람자의 몫이지요” 이 화백은 현재 살고 있는 삶과는 다른 형태의 보다 이상적인 삶을 찾아내어 그림을 그린다. 그런 그의 삶과 작품에는 무엇보다 세속의 번잡함을 끊어버린 과감한 탈속성이 돋보인다. 이번 전시에는 3년~5년전부터 준비해 최근까지 공들여 완성한 작품도 있는데 구작 3점을 포함해 16작품이 출품됐다. 모두 미공개작으로 첫 선을 보이는 작품들이다.
화가의 상상력은 경계가 없어 뵌다. 어떤 작품에도 단정 지어 화제를 달지 않는 이유의 근간이다. 그래서 얼핏, 파격적인 구도의 작품들에서 탑은 왜 기울어져있는지 왜 인왕상이 출현하는지, 풍탁으로서 물고기는 왜 공간에서 유영하는가에 대한 여러 장치에 매몰되지 말 것을 당부한다.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꿈을 꾸지 않으면 구태를 탈피할 수 없다며 자유스러운 발상과 상상에서 시작한 작품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시도하지 않았던 모래와 안료를 섞은 기법도 선보인다.
‘꿈에서 꿈이로다’ 라는 이번 전시명도 화가가 직접 지었다. 일상을 지탱하다가 지루하면 꿈을 꾸고 꿈꾸다가 다시 굳건하게 현실을 꾸려가는 삶의 모습을 표현했기에...,
분황사를 배경으로 우주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에선 오로라가 피어오르며 무수한 별들을 크레용으로 마구 휘감아 올리듯 표현해 한층 몽환적이다. 거센 바람을 온몸으로 마주하며 극복해 살아가는 여인에게서는 삶의 굳건함이 전해진다. 탑신에 표현된 풍탁에서는 구애없이 유영하거나 비상하는 자유로움을 선사한다. ‘취매향’에는 잡스러운 것에서 벗어난 듯 찬 공기가 가득하다. 영양 신사리 고추밭 석탑은 화가 자신의 수작으로 꼽는다. 가히 독보적이다. 석탑을 배경으로 피어난 사계의 아름다움은 연작으로, 혹은 하나의 작품으로 표현된다. 영양의 화천리 폐광촌에서 석탑을 배경으로 한 작품은 상처투성이의 삶에서 건져 올린 삶의 희망을 고요하게 승화시킨다. 부모님께 바친 헌화(獻畵)였던 ‘운주사 소견’은 약 한 달간 운거하면서 그렸다고 한다.
-“작품 경향도 달라지고 표현기법도 달라져서인지 보는 이들도 편하게 봅디다” 이 화백은 작풍이 바뀌었다는 평에 대해 “항상 색을 직접 연구하고 제조해 사용해왔어요. 예전보다 힘의 완급이 조절됐어요. 아직도 미완이긴 하지만 이전의 직접 개발한 천연안료와 밀랍 작업이 무척 고단했었어요. 그때보다는 힘을 빼고 편안한 방법으로 그렸지요. 아크릴 물감에 수성이나 유성 페인트 등 공업용재료를 혼합해 보다 간단한 기법으로 시도했습니다. 작품 보존 문제는 검증돼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어 혼합재료는 더 연구해야 할 부분이긴 합니다. 작품 경향도 달라지고 표현기법도 달라져서인지 보는 이들도 편하게 봅디다”라고 했다. 표현기법과 재료의 제약에서 자유로워지면서 이전보다 담백하고 붓질의 움직임도 훨씬 여유롭게 보이는 대목이다. 이 화백은 변함없이 한국적이고 전통적인 소재를 바탕으로 한다.
“생래적으로 경주에서 자라서겠지요. 경주 산천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체화된 연유인 듯합니다. 표현의 기법이나 재료에서 자유롭기를 바라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법을 늘 궁구합니다. 화력, 화업이 쌓일수록 아이의 마음이 됩디다. 보는 대상이나 시각이 선명해지고요. 조희수 선생(경주예술학교 1회 졸업생이며 유일한 생존 작가)도 ‘태태야 잘 그리려고 하지마라. 생각이 시키는대로 해라’고 하십니다. ‘잘 그리려고 껍데기에만 신경쓰지마라. 공갈빵 된다’라는 가르침을 늘 새기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신작들에선 한층 더 가벼워진 탈속의 기운이 넘친다.
-“제2의 황술조, 김만술 같은 후배들이 배출돼야지요. 작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존중해 준 적 있는지도 반추해 보아야” 현재 경주작가들의 위상과 경주 1세대와 2세대 작가군에 대한 조명이 집중되는 것에 대한 질문에는 “안타까운 이야기 입니다. 경주 작가 1세대와 그 다음 세대에 대한 연구와 화업의 정립은 매우 중요하고 잘 마무리 돼야합니다. 더불어 우리는 후배들이 자유롭게 활동하고 기량을 펼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줘야 하는 몫이 남아있습니다. 제2의 황술조, 김만술 같은 후배들이 배출돼야지요. 젊은 지역작가들이 경주다운 색깔을 내고 경주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터전을 조성해 주어야 합니다. 후학들이 혹독한 현실의 장벽을 견뎌내고 자존심을 견지하며 작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존중해 준 적이 있는지도 반추해 보아야 합니다. 그 자존심을 존중해줄 때 수단으로서의 경제적 부분은 극복할 수 있겠지요. ‘옳은 풍류’를 구현할 수 있도록요. 그렇다면 적은 무대일지라도 자긍심을 가지며 진지하게 작품에 대해 고민할 수 있을 겁니다”
-“지역작가와 후배작가들이 존립할 수 있는 터전으로서 전시공간 확보와 미술관 설립은 만시지탄” 이어 최근 지역의 핫 이슈인 경주시립미술관 건립에 대한 생각도 털어놨다. “우선 미술관의 성격과 정체성부터 명확하게 들여다봐야 합니다. 미술관은 작품을 수집해 보관하고 연구하는 곳이고 전시장은 발표의 장(場)으로 무대와도 같습니다. 이 둘의 차이를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 전제입니다” 가난한 지역작가와 후배작가들이 존립할 수 있는 터전으로서의 전시공간과 미술관 설립의 당위성에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경주는 현대미술의 메카로, 경주를 빼고는 대한민국 미술사를 논할 수 없을만큼 위상이 우뚝한데 시립미술관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우리 미술인이 작품을 기증하고 싶어도 기증받을 준비가 돼 있지 않은 것이 지금의 경주시입니다”
-“제 인생에서 그릴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꿈을 꿨으면 알맹이를 내보여야 하겠지요. 작가가 붓을 들고 있는 한 끊임없이 새로운 작업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부가 고기를 잡지 않고 농부가 농시 짓지 않으면 안 되듯 계속 작업을 해나가는 것이 화가지요. 조희수 선생께서 ‘이봐 태태야. 긴 외도(작품활동을 잠시 미뤄두고 1983년, 경주와 대구서 ‘이가 화랑’을 운영했고 서울 인사동에서도 화랑을 운영하는 등의 시기)끝에 돌아와 시작했으니 단단하게 쌓은 네 집을 지어야 되지 않겠나. 내가 뒤에서 못도 챙겨주고 기둥도 세워줄게’라고 하십니다. 멋진 선배를 두어서 저는 참 행복해요. 저도 후배들에게 그런 선배가 되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안됩니다”
“제 인생에서 그릴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후회 없었고 앞으로도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즐거운 일이 되겠지요”
-에필로그...취재를 마치면서 ‘통시(通時)’, ‘태태’. 이태희 화백을 수식하는 호이자 별칭부터 예사롭지 않다. 이 화백은 그 흔한 포트폴리오(portfolio) 하나 가지지 않았다. 온갖 화업과 경력과 수상내역을 빼곡하게 정리한 자료로 화가를 먼저 이해하고 인지해 온 기자에게는 그런 이 화백이 다소 생경할 정도였다. 전시자료라고 건네준 건 달랑 작은 엽서 크기의 안내장 한 장이 전부였다. 그래도 이 화백이 좋았다. 그런 날것의, 그림 이외엔 아무것도 관심 없는 듯한 선생의 비효율적인(?) 성품이 참 좋았던 것이다. 작품으로는 조용히 웅변하지만 선생의 거침없는 언어는 때론 직격탄을 쏘아 올리기도 하고 적확하게 꼬집는 통렬함이 있어 탄산수 같이 속시원했다.
카페공간을 겸하는 갤러리 화(龢)에서 만난 이태희 화백은 ‘옳은 풍류인’으로서 화가들이 자긍심을 가질 것을 주문했다. 그 기저에는 화가에 대한 예우와 존중이 기반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2020년 올 한해 우리는 코로나로 우울해지고 심신이 지쳤다. 마치 축복과도 같은 이 전시를 보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영역을 확고히 해 온 이 화백의 내공에 다시 한 번 놀랐다. 경주예술학교 1회 졸업생이며 유일한 생존 작가인 조희수 화백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하고 있어서일까. 조 화백의 가르침을
자주 인용하고 화우들인 최용대, 강민수 화백과의 교류를 통한 시너지에 대해서도 수차례 언급했다.
연륜과 연단된 정신을 통해 더욱 내밀해지고 깊어진 작가정신으로 돌아온 그의 작업은 여전히 굵은 힘줄과 긴장된 근육을 가지고 있었다. 선후배 화우들과 교류하면서도 상상을 달리하고 시각과 방법에서 자유로우며 어떤 것이든 수용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태희 식’이라고 한다. 이 화백은 그래서 누구보다 젊다.
-사진촬영/제공 : 신광사진관 김상범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