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국 재계(財界)의 큰 별 하나가 졌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 영면(永眠)에 든 것이다. 거인의 죽음으로 주목을 받은 것은, 집무실 액자에 걸려 있었다던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금구(金口)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아들을 위해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쓴 글귀다. 원문에는 바로 뒤에 ‘이것이 인생이다[是人生]’가 붙어 한 문장이, 아니 인간의 한평생이 완성된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탄생과 죽음, 그 예외 없이 시작되고 끝맺는 일생을 ‘빈손’으로 표현해 내는 지혜가 날카롭고도 씁쓸하다.
누구 하나 자신의 의지대로 태어난 사람은 없다. 다들 영문도 모른 채 태어난다. 또 언제 죽을지 알고 죽는 사람도 없다. 우리는 원치 않는데 태어났고 또 준비되지 않는 채 죽는다. 옛 고려 나옹(懶翁) 선사의 누이가 지었다는 ‘부운(浮雲)’이라는 제하의 시는 이어서 묻는다. ‘새 생명은 어디서 왔으며[生從何處來], 또 그 죽음은 어디를 향해 가는가[死向何處去]?’
사실 이 대목은 우리에겐 매우 난처한 문제다. 겨우 한 생만을 사는 우리가 어떻게 삶 이전과 그 이후를 알까? 인간의 좁은 시야로는 무리다. 하루살이는 가엾게도 입이 없다고 들었다. 영양분을 섭취할 기관이 없다는 것은 하루살이에게 ‘내일’이 없다는 뜻이다. 우리도 하루살이와 다르지 않다. “오랜만에 죽어봤는데 영 힘드네” 하고 엄살 부리는 사람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에게 죽음 그 너머는 미지의 영역이다.
그래서일까, 동서양의 종교는 죽음 그 너머의 세계를 제시해 왔다. 유한함과 결핍의 주체인 우리가 태생적으로 갈망하는 건 무한과 영원이다. 한 번의 삶을 사는 우리(고객)에게 영원한 삶(서비스)을 제공하는 측면에서 종교 비즈니스는 그래서 불황을 모른다.
노래는 이어 ‘태어남은 한 조각구름이 일어나는 것[生也一片浮雲起]이고, 죽음은 그 구름이 사라지는 것뿐[死也一片浮雲滅]이라고 했다. 삶과 죽음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니란다. 또 구름이 한 번만 생겼다 사라지는 게 아닌 것처럼 태어남과 죽음도 어쩌면 계속 반복된다는 뉘앙스다. 영원과 불멸을 희망하는 우리에게 구름 같은 삶은 유한함이자 가짜(실체 없음)일뿐이다. 그러니 바로 이어 ‘뜬구름은 원래 진실함이 없나니[浮雲自體本無實] 태어남과 죽음도 모두 이와 같네[生也去來亦如然]’라고 했다. 빈손으로 시작된 노래는 이렇게 회색빛 암울한 결론에 이르는 듯하다.
하지만 이렇게 맹송하게 노래가 끝난다면 한국 드라마(?)가 저 멀리 남아메리카에서까지 인기일 리 없다. 엉뚱한 비유지만 노래의 진정한 ‘반전’은 이제부터다. ‘여기 한 물건이 항상 홀로 있어[獨有一物常獨露] 담연히 생사를 따르지 않네[澹然不隨於生死]’
흔히 불교에서 ‘한 물건’이란 우리의 순수한 참 마음을 가리킨다. 생사는 유한하지만 그것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토대나 장(場)으로 마음자리[참마음]는 영원하다고 주장한다. 그 순수한 마음자리가 사람이 태어나기 이전의 상태이며 죽어서 가는 종착지다. 순우리말로 죽음을 ‘돌아가셨다’고 표현하는 것도 이를 전제로 한 개념이다.
불교 논리는 이렇게 부정적인 생과 사의 관점을 참 마음에 대한 인식 전환으로 절대 긍정한다. 마치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게 봄이 ‘죽고’ 여름이 ‘태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생과 사의 방식으로 ‘불멸’의 세월이 완성되는 것처럼 말이다. 단 1초의 멈춤도 허락하지 않는 영원한 세월이 있는데 어느 누가 봄이 죽었다고 울고 또 여름이 태어났다고 웃겠는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창업주가 이건희 회장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돈의 본질과 긍정성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쩌면 부(富)는 ‘소유’가 아니라 ‘흘러감’이자 ‘이어줌’이라는 본질을 환기하고 싶었을 테다. 소유하려 들면 빈손으로 허망하지만, 알아서 흘러가고 막히면 돌아가도록 두면 그 회복된 체성은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외국엘 나가보면 공항에서부터 거리의 전광판, 사람들 손에 들린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삼성 마크가 잘 보이는 이유다. 경영권 승계 등 여전히 많은 문제들이 남아있지만, 창업자로부터 면면이 이어온 그 ‘빈손 정신’이 부디 끊이지 않고 굳건히 이어나가길 바래본다. 어제도 있지만 우리에겐 더 중요한 내일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