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향가연구를 하면서 일본 연구자들의 방법을 따르지 않았다. 그것은 민족주의적 정서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의 방법에 뿌리를 둔 우리의 향가 해독법이 100년이 넘도록 성과를 내는데 미흡하였기에, 비슷한 길로 가 보았자 그 결과는 원오브뎀에 불과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순전히 실용적 이유에서였다. 이 방법은 앞에 간 수레 뒤를 따르지 않겠다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기에 고행이 예약되어 있었다. 가도 가도 황무지 가시덤불이었다. 어디에도 길은 없었고, 걸어간다 한들 답이 나올 것이라는 확신도 없었다.
유홍준 교수님께서 문화유적 답사기 실크로드편에서 인용한 법현(法顯)스님의 ‘불국기(佛國記)`라는 책 한 구절이 당시의 막막했던 나의 심정과 흡사했다. 다음은 서기 399년 실크로드 사막길을 횡단하며 법현스님께서 쓰신 글이다.
“사하(沙河)에는 악령과 열풍이 심하여 이를 만나면 모두 죽고 단 한사람도 살아남지 못한다. 하늘에는 날아다니는 새도 없고 땅에는 뛰어 다니는 짐승도 없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망망하여 가야할 길을 찾으려 해도 알 수가 없다. 다만 언제 이 길을 가다가 죽었는지 모르는 죽은 자의 해골과 뼈만이 길을 가리켜 주는 이정표가 될 뿐이다”
법현 스님이 가보았던 길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길을 싫도록 걸어 보았기에 필자는 ‘향가로드는 아무도 걸어보지 못한 황무지였다`라는 말을 종종 한다. 그러나 길이 아주 없지만은 않았다. ‘죽은 자의 해골과 뼈만이 이정표였다’라는 법현스님의 말씀대로 앞선 순례자들의 실패 흔적이 가서는 안될 길을 알려 주었다. 해골과 뼈가 있는 곳이라면 거기는 가서는 안되는 길이었다. 가다 쓰러지면 일어나지 못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횡단을 끝내고 뒤돌아보니 향가연구에서 죽음에 이르는 길은 ‘한자를 소리표기로 보는 길’이었다.
대신 필자는 사는 길, 즉 새로운 길을 열어야 했다. 필자가 생각해낸 길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향가를 무턱대고 풀려는 것보다, 향가를 어떻게 창작했을 것인가를 찾는 것도 영리한 방법 중 하나였다. 지어진 건물을 보고 설계도를 그리는 것과 같이, 만들어진 향가에서 거꾸로 창작법을 찾아보는 방식이었다. 향가가 헝클어진 암호처럼 느껴지기도 해 암호 전문가를 찾아 조언도 구했다. 그가 응원하며 말했다.
“복잡한 국가의 암호체계 해독도 작은 단서에서 부터 시작된다. 최고급 수학 전문가들을 모아 해독에 착수해보았지만 단서는 의외로 그들이 아니라 그들보다 능력이 떨어진 평범한 연구진이 발견하는 경우도 있었다. 암호 체계 해독에서 첫단서를 잘못잡으면 그 암호풀이는 개미지옥 속의 개미들처럼 평생을 헤맬 뿐 결국 해독에 실패하고 만다”
향가 연구의 큰 줄기는 암호문 해독과 비슷한 길이었다. 단서들을 하나하나 검토해보는 작업이 밥먹듯이 반복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양주동 박사님의 묘소를 참배했던 일이 있었다. 양주동박사님은 향가 해독 한일 백년전쟁의 맨 앞머리에 서서 1937년 향가를 해독해낸 최초의 한국인이다. 괴이한 습관이란 생각이 들겠지만, 필자에게는 일을 하다가 그 일과 관계된 역사적 인물의 묘소를 찾는 습성이 있다.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과 집현전 정인지 선생 묘소도 당시 내가 찾아본 문자와 관련된 분들의 묘소였다. 그 분들의 묘 앞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마음으로 주고받는 것이다.
경기도 용인에 있는 박사님 묘소에 올랐던 날, 일이 일어났다. 묘소 앞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는데, 영감 하나가 어두운 밤 석영 부싯돌의 불똥처럼 튀어올랐다. 원효대사께서 지은 것으로 알려진 <원왕생가> 향가 속에는 “향언운 보언야(鄕言云 報言也)”라는 구절이 있다. “혹시 이 6글자 가운데 박혀 있는 ‘보+언(報+言)’이라는 두 글자가 특별한 의미를 가진 일종의 단어가 아닐까?”라는 영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적중하였다.
황소가 길도 아닌 길을 걷다가 작은 구멍 밖에 삐죽 나와 있던 쥐 꼬리를 밟은 격이었다. 순전히 우연이었다. 문제의 두 글자, ‘보+언(報+言)’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꼬리가 나와 있던 향가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발견해 냈던 것이다.
순전히 우연에서 시작되었지만 필자는 두 글자가 가리키던 단서를 놓치지 않았다. 일년도 넘게 끊어질듯 끊어질듯 가늘게 이어진 구멍을 흙투성이가 되어 이리저리 파헤치다가, 마침내 향가 안에 ‘보언(報言)’이라는 문자 group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던 것이다.
그랬기에 만엽 4516번가 첫 구절 중 일본의 연구자들이 풀려고 헤매었던 개미지옥 6글자, ‘애애 파도파류(乃乃 波都波流)’가 보언에 해당할 수 있음을 한 눈에 알아보았던 것이다.
여섯 글자가 향가에서 만엽으로 통하는 연결구멍이 되어주었다. 필자는 흙바닥에 주저앉아 아직 발굴되지 않은 연결구멍 틈바구니에 꽃삽을 조심스럽게 꽂아 보았다. 꽃삽의 끝에서 무엇인가 이상한 감촉이 왔다. 꽃삽의 끝이 무언가에 ‘타칵’하며 부딪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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