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경주지역 유학사를 얘기할 때 화계(花溪) 류의건(柳宜健,1687~1760)과 활산(活山) 남용만(南龍萬,1709~1784) 등은 후학양성과 학문정진에 매진한 인물로 정평이 나 있다.
영덕에서 경주로 정착한 영양남씨 우암(寓庵) 남구명(南九明,1661~1719)은 2남(南國衡·南國華) 2녀를 두었고, 장남 남국형은 5남(南潤萬·南龍萬·南胄萬·南濟萬·南濡萬) 2녀를, 또 남용만은 동애(桐崖) 남경채(南景采,1736~1811)·치암(癡菴) 남경희(南景羲,1748~1812) 등 빼어난 문장가를 두었다. 특히 남국형(南國衡,1687~1745)은 남용만과 그의 아들 남경희 등 빼어난 학자를 둔 아버지이자 이름난 효자였다. 부친인 우암공이 넉넉한 벼슬살이를 하면서도 부친의 명성으로 편히 살지 않았고, 주경야독하며 자식의 본분을 지켰다. 그리고 모친의 오랜 병수발로 장남인 자신은 과거공부를 중도에 그만두었지만, 그 덕분에 동생들은 과거급제하여 입신양명을 이루게 하였다. 평소 원대한 뜻을 품었지만, 부모를 위한 마음과 형제를 걱정하고 원망하지 않은 그 마음은 오히려 참으로 당시 효행의 모범이 되었다.
나이가 같고 평소 친분이 돈독하였던 남국형과 류의건은 아들 남용만을 류의건에게 보내 학문을 닦게 하였고, 활산은 훗날 화계의 사위가 되어 남경희·남경화(南景和) 등을 낳았다. 이들 세 사람은 학문적 교류는 물론이고 서산류씨와 영양남씨 혼반(婚班)을 통해 신뢰를 돈독히 하였다.
남국형에 대한 기록은 집안에 전하는 글 외에는 거의 없고, 화계가 영친안(榮親宴: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부모를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벌이던 잔치)에서 친구 남국형를 위해 한시를 지어 축하한 일이 전한다.
나[류의건]의 벗 남국형(자 순회)은 자식이 5명 있는데 모두 훌륭한 선비로, 넷째가 먼저 과거급제 진사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어려서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진실로 기쁜 일이며, 하물며 부모가 모두 살아있으니, 잔칫날에 절구 한수를 지어 축하하였다. 『花溪集』卷15개의 향기로운 난초가 집안에 가득하고 五箇芳蘭菀滿家 때가 되니 먼저 한 가지에 꽃을 피웠네 時來先發一枝花 끝없고 생동감있는 봄의 정취에 응하니 生生春意應無盡 동호의 병든 늙은이를 위로하는듯 하네 慰爾東湖老病査 넷째 박제만(南濟萬,1712~1746)은 여러 형제 중 1741년 30세의 나이로 식년시 병과에 급제하여 진사에 먼저 올랐고, 당시 활산의 스승인 화계선생이 남국형의 교유로 축하의 절구를 지었다. 하지만 활산은 동생이 먼저 죽은 것에 매우 안타까워하며 손수 묘지명(「亡弟槐院正字君墓誌銘」)을 지었고, 화계 역시 만사(輓詞)를 남겼다. 아들 남용만은 부친의 묘지명 『活山集』卷7,「墓誌銘·本生考通德郞府君壙記」를 지어 행적을 또다시 추억하였다. 본생 고 통덕랑 부군 광기(本生考通德郞府君壙記) 선친 남국형 공의 자는 순회(舜會)로 숙종년간 정묘년(1687)에 태어나서, 을축년(1745) 6월 20일에 돌아가셨으니, 향년 59세다. 그해 10월 모 갑자에 불국사 북쪽 간산(艮山)에 장사지냈고, 계유년 10월 28일 정개산(鼎蓋山) 남쪽 장항동 부감(負坎) 땅에 이장하였다. … 부친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원대한 뜻이 있었다. 커서는 가문의 큰 사람이 되어 기대하는 바가 있었지만, 모친 이씨가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학업을 그만둔 지가 거의 12년이 되었다. 우암 남구명 공께서 전국에서 벼슬을 할 때 관아를 따라 수행하지 않고, 집에 머물며 과거공부를 하고자 하였다. 부군은 책을 보면서도 농사일을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 해의 기한(飢寒)에 대비하였고, 일찍이 부친의 녹봉과 명성을 처자식의 생계로 삼지 않았다.
우암공이 장차 관직을 그만두고 내려오려 할 때, 부군은 문득 매사냥꾼을 따라 산에서 맛있는 포를 구하고, 몸소 물고기를 잡아 작은 웅덩이를 파고는 물고기를 살려두었다. 사람들은 “필히 관주(官廚)에 있으면서 남은 것을 공급하더라도, 어찌 고생이 이와 같으리오”하였다. … 기해년 우암공이 집에서 돌아가시자 슬퍼함이 예를 지나쳤고, 5일 간 간장조차 먹지 않았다. … 넷째 동생이 신유년(1741)에 급제하였으니, 또한 매우 기쁘지 않은가? 나이는 들고 병은 더욱 깊어가는데 남용만이 수십리 땅에 있으면서, 밥을 먹다가 숟가락을 던지고 달려온 것이 여러 번이다. 임종 하루 전에 퇴근해서 집으로 가는데 익조(翼朝)에서 급보를 듣고는 버선발로 달려왔으나, 이미 큰소리로 불러도 미치지 못하였다. 남용만은 큰 죄를 지었으나 어찌 차마 말을 하겠는가? 아! 부군께서 평생동안 행실이 비록 세상에 드러날 만한 업적이 없지만, 당시에 보는 자들이 “필히 이 사람은 마땅히 다복을 누릴 것이다. 대개 성품이 신중하고 너그럽고, 남의 단점을 말하지 않고, 무릇 슬프고 기쁨에 모두 성실하고 거짓이 없었다”하였다.
향시에 붙었으나, 대과에 뜻을 두지 않았으니, 병으로 일찍이 과거를 그만두고는 대략 가치가 없다고 여기시고, 저희들 형제는 매년 과거에 급제해 거듭 서울로 올라갔지만, 또한 득실을 개의치 않았다. 부인은 여강이씨 회재선생의 5대손 이덕함(李德咸)의 따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