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만엽 4516번가에 신라 향가 1법칙과 2법칙이 적용되어 있다는 것을 설명드렸다. 그러나 독자들께서는 이에 대해 고개를 갸웃하며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실 것이다.
한자는 뜻글자이니까 뜻으로 쓰였을 것임은 초등학생이라도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고, 지금의 일본말도 우리말과 어순이 비슷한 걸로 보아, 그렇게 써두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 당연한 이치를 가지고 무얼 신문에 칼럼 글 쓰고, 학회에는 논문 내고 시끄럽게 호들갑을 떠느냐 하실 것이다.
언뜻 보면 지당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이것이 절대 당연한 일이 아니란 것을 주변 사정을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만일 만엽집의 한자들이 뜻으로 쓰여 있다면 한문공부 중급을 뗀 사람이라도 술술 풀어낼 수 있을 것이기에 특별한 연구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일본 연구자들이라고 바보가 아니다. 그들 역시 뜻글자로 무수히 시도해 보았으나 풀리지 않았고, 궁한 나머지 표음문자로의 해독을 시도하였다. 1000여년 전 만엽집 연구를 시작한 일본의 연구자들은 `만엽의 한자는 뜻이 아니고 표음문자로 쓰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심지어 우리나라 연구자들까지도 이 입장에 동조하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그것이 뜻글자로 되어 있다고 하면 튼튼한 것으로 알고 편안히 앉아 있던 나무의자가 와지끈 부서지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이제 와서 어쩌란 말인가. 만엽집의 한자들이 뜻으로 쓰이지 않고 있다는 주장은 이처럼 뿌리가 깊다.
한자가 한국어 순서로 나열되어있다는 것도 그렇다. 만엽집 이전 고대 일본말의 어순이 어떠했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민족기원이 태평양 섬이나 먼 대륙에서 왔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일본 열도에 정착한 고대인들의 언어가 어떠한 어순으로 되어있는지 별로 알지 못하고 있다.
앞에서 인류 언어사를 보면 한 지역 사람들이 사용하는 어순이 민족 간 접촉에 의해 몽땅 바뀌어버리는 사례가 왕왕 있다고 하였다. 일본이 이에 해당할 수 있다. 민족 형성이 한반도와 근본적으로 다르고, 이후 한반도에서 제한적인 영향을 받았을 뿐이라는 일본인들의 주장이 맞는다면, 그들의 언어에는 필연적으로 한반도인과의 접촉 흔적이 화석처럼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그 흔적 중 하나가 현재 일본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어순이라고 본다.
만엽집이 한국어 어순으로 배열되어 있다는 사실은 한반도의 사람들이 일본 땅에 소수의 정치 엘리트들과 문물만 수출한 것이 아니라, 언어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어순까지 수출하여 교체시킨 증거가 되는 것이다. 이는 훗날 별도로 검토되어야 할 사안이다.
필자는 신라향가 1,2법칙이 만엽가 4516번가에 적용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드렸으니, 이제 신라 향가 3법칙 역시 적용되어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노랫말-청언-보언
신라향가 제3법칙 (향가=노랫말+청언+보언) 3법칙이란 ‘신라향가는 노랫말+청언+보언으로 되어 있다’는 법칙이다. 노랫말이란 작품의 줄거리고, 청언(請言)이란 천지귀신에게 비는 글자다. 보언(報言)이란 배우들에게 연기할 내용을 알려주는 문자다. 이러한 기능을 하는 글자들을 나름으로 섞어 향가를 만든다는 법칙이다.
글자들을 섞어 놓았다는 것을 ‘가오다다’라는 문장으로 예를 들어 설명하겠다. 신라사람 누군가가 ‘가다+오다’라는 문장을 써두었고, 우리가 최근 이를 발견했다면 뜻을 파악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인이 두 문장을 쓰면서 글자를 일정한 순서로 섞어 ‘가다+오다 → 가오 다다’로 써두었다면 당황스럽다.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문장이다. `가오`는 `가다+오다`에서 첫 번째 글자를 모은 것이라고 보아야 비로소 풀리는 구조다. 소박한 비유였겠지만 신라인들은 향가를 만들 때 이런 식으로 글자를 섞었다. 물론 이보다 더 복잡하게 섞여 있지만.
월명사와 처용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작가분들은 짓궂으신 분들이었다. 노랫말과 청언, 보언에 해당하는 글자들을 섞어 암호문 같은 문장으로 만들어 놓고는, 힌트도 주지 않으신 채 훌훌 털고 가버리신 것이다. 한국인들은 삼국유사에서, 일본인들은 만엽집에서 `가오다다`와 같은 정체불명의 글을 발견하였다. 일본인들이 먼저 풀이에 나섰다. 온갖 방법을 동원하였으나 풀리지 않았다. 한자니까 한문이겠지 한 것은 오판이었다. 소리 나는 대로 써두었나 했으나 그것도 아니었다. 만엽가 4516장은 오사카성처럼 난공불락의 성채로 다가왔다. 개미지옥 속에 개미가 빨려 들어가 헤어나지 못하듯 일본 연구자들 모두가 문자지옥 속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