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잎이 무성할때는 잘 보이지 않았던 과실들이 영글어 도드라져 보이는 계절이다. 월성 뒤안길을 느린 걸음으로 걸어보셨는지. 월성을 마주하는 작은 ‘서욱마을’은 아시는지. 이 마을을 아는 이는 있어도 마을 안쪽으로 발걸음 하는 이는 잘 없다. 마을의 모양새가 얼핏 눈에 잘 띠지 않기도 하고 지나쳐가기 쉬운 위치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마을 곳곳의 소박한 아름다움이 거의 노출되지 않았던 곳이다. 겨우 스무 몇 채의 집들로 이뤄진 이 작은 마을의 골목길은 세 갈래 정도로 나눠진다. 완만한 경사길의 골목길은 묘한 설레임을 주고..., 이 동네는 주변 자산이 엄청난 마을이다. 동남산가는길의 시작점인 인용사지, 춘양교지를 시작으로 통일신라 최치원이 임금에게 글을 올리던 장소였던 상서장, 고청 윤경렬 고택, 남산탑곡마애불상군, 경북산림환경연구원 등이 지척이기 때문이다. 윤경렬 고택이 있는 양지마을로 가는 길목에서 왼쪽으로 위치해 있는 이 동네 입구에는 수 백년 수령의 왕버드나무가 노쇠하지만 마을의 운치를 더한다. 쪼르르 시멘트 담 벼락에 줄지어 심겨져 있는 붉은 맨드라미는 이곳 시골스런 마을에선 유독 앙큼하다. 남천내를 사이에 두고 국립경주박물관과 박물관수장고를 바로 마주하며 월성과 월정교가 지척인 이 작은 마을은 다소 높은 언덕에 조성돼 있는 형상이다. 어느 한 집도 햇살 바르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로 양지 바른 곳으로 가을 햇살에 등이 따끔거릴 만큼 온기 가득한 마을이었다. 특히, 이 동네는 골목 어디서든 모래가 유난히 고운 남천내 너머 박물관과 월성이 바라보이는 비경을 자랑한다. 3기8괴 중 하나인 ‘문천도사(蚊川到沙, 문천(남천)에 흐르는 물이 너무도 맑고 고와서 물은 아래로 흐르지만 모래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함) 전설이 과장이 아님을 증명해준다. 동요 노랫말에 나오는 금빛 고운 모래 속, 멀리 한 떼의 물고기들이 유유자적하다. 그곳에 신라시대 춘양교(일정교)의 터가 남아있다. 최근 마을 춘양교지 주변은 석재유물 정비공사와 사적지 주변 정비사업이 거의 막바지 단계였다. -‘서욱마을’은 구 인왕동 중 한 마을...남천에는 춘양교(春陽橋, 일정교(日精橋)) 터 남아있고 그 다리터 찾아 교각의 원형 상상해보아도 좋을 듯 서욱마을은 구 인왕동의 한 마을로, 현재는 1998년 행정동 통합으로 인왕동과 교동이 월성동으로 통합되면서 월성동에 속해있다. 인왕동은 이른 신라시대 부터 월성에 궁궐이 자리 잡았다.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의 둘째왕자 김인문의 원찰(源刹)인 인용사(仁容寺)와 남산에 있는 왕정곡(王井谷)의 첫 글자를 따 인왕리(仁旺里)라 했다. 인왕리는 남천과 인용사 주변 마을로 동리 가운데 남천(南川, 蚊川)이 흐른다. 신라 왕성인 월성을 중심으로 그 남쪽을 흐르는 하천인 남천을 관통하며 건설된 신라시대 두 교량 중 하나가 춘양교(일정교)다. 이 마을에 춘양교의 다리터가 남아있었다. 월정교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춘양교지(春陽橋地, 일정교지(日精橋地))는 국립경주박물관 바로 뒤쪽에 위치한 옛 다리터다. 경덕왕 19년(790)에 ‘궁궐 남쪽 문천 위에 월정교, 춘양교 두 다리를 놓았다’라는 기록이 전해지는데, 교각은 센 물살에 견딜수 있도록 주형(舟形)으로 쌓았다. 신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다리는 남아 800여 년을 버티다 16세기 초반 이전에 관리부족으로 무너졌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 다리터는 우리나라 고대 교량의 축조방법과 토목기술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라 왕경의 규모와 당시의 교통로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2천여 년의 세월에도 끄떡없이 남아있는 고대 교각의 기초석은 신기할 정도였다. 춘양교지는 다리 양쪽의 교대와 날개벽 그리고 양쪽 교대사이의 강바닥에 주형 교각 3개로 이루어져 있다. 아직 기초석과 함께 남아있는 돌다리를 ‘징검징검’ 지나 건너보았다. 시간을 거슬러 기초석과 부자재들을 건너 만져보고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유유히 흐르는 맑은 물길 속으로 손을 넣어 고운 모래의 촉감도 느껴보았다. 그 옛날 고대의 속살을 만져보는 듯 했다. 춘양교가 복원되기 전 춘양교의 가장 기본적인 뼈대를 직접 볼 수 있는 시간은 한정적이다. 월정교와 달리 일정교는 부재가 훨씬 많이 남아있다고 하니 복원되기 전 이 다리터를 찾아 교각의 원형을 상상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현재 신라왕경 핵심 유적 복원정비 사업 중 하나로 남천에 드러나 있던 사적 제457호 춘양교지 정비사업으로 너른 잔디 광장을 조성하고 있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1년부터 2003년까지 발굴조사를 실시할 당시 교량에 사용됐던 석재 1469점이 하천 바닥에 흩어진 상태로 출토됐던 것을 우수기 유실 등의 우려로 춘양교지 인근 사적지 2만7천㎡를 정비해 석재유물 728점을 이전 전시하고 탐방로 436m를 개설해 월정교와 연계한 역사문화유적 탐방로를 정비하는 것이다. 이 사업이 완료되면 월정교와 연계돼 시민과 관광객들의 발길이 더욱 잦아질 것으로 보였다. -상서장, 박물관, 월성이 지척인 마을...“최근 주말에는 우리 마을 골목길로도 외부 관광용 차량들이 자주 들락거려서 주민들과 자주 마주쳐요” 서욱마을 안내표지판에는 ‘동남산가는길, 정순임전수관 150m, 상서장 220m’라고 표시해 두었다. 서욱마을은 인왕동 1통 3반~4반인 마을로, 서욱마을의 전체 가구수는 약 23~24가구 정도라고 한다. 마을 입구에는 예전부터 있어왔던 빨래터가 깔끔하게 단장돼 주민들은 크고 작은 빨랫거리를 아직도 이곳서 빠는 일이 잦다고 한다. 마을 안쪽 반달길로 조금 걷다보니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보유자로 선정된 명창 정순임 선생 전수관이 나타났다. 마침 선생의 여러 제자들이 분주하게 비지땀을 흘리며 전수관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이 전수관은 지난해 수해로 침수되어 약 1년간 방치해두었다가 선생의 제자들 연습장으로 다시 활용하기 위해 수리하고 보수하는 중이었다. 전수관에서 이어지는 오르막 골목에서 어르신들을 만났다. 스물 한 살에 결혼해 당시 반월성내에 살다가 이 마을에 산 지 50년이 넘는다는 한 어르신은 81세라는 연세가 믿기지 않을만큼 곱다. ‘좋은 동네 살아서 그런가?’라며 은근히 마을 자랑을 한다. 이곳 주민들 역시 농사를 짓는 이가 많은데 마을 주변보다는 외곽에 있는 농지로 농삿일을 한다고 했다. 어르신들은 입을 모아 “최근 주말에는 우리 마을 골목길로도 외부 관광용 차량들이 자주 들락거려서 주민들과 자주 마주쳐요. 지난 주말에도 엄청났어요” 라고 한다. “신축이래야 20년 넘은 주택이 몇 채 있고 거의 50~60년 된 집들이예요. 아마도 옛날 반월성 내에 십 여 채 살던 주민들이 철거되면서 바로 이웃동네인 이곳으로 이주한 집들도 있을 거예요” -집과 골목길은 각기 다른 체온을 가진다. 사람이 있어 ‘집’이고 골목에는 생기가 돈다. 춘양교 터를 지나 ‘솔향기 민박집’ 부터는 인왕동 1통 4반이라고 한다. 바로 안쪽 막다른 골목끝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칠성교계룡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나타났다. 이 절은 주지스님이 돌아가셔서 지금은 비어있는 상황이라고. 암자 바로 옆 골목길은 1m도 채 안되는 좁은 골목길이었다. 바로 월성을 마주 바라볼 수 있는 이 길은 작은 길임에도 반질거렸다. 길은 오래도록 이곳을 지나갔을 사람의 온기를 품고 있었다. 집과 골목길은 각기 다른 체온을 가진다. 사람들이 뻔질나게 다니는 길과 집은 반질거리며 혈기 좋은 색을 띠지만 손길과 발길이 뜸한 집과 골목길은 창백하게 굳어있다. 사람이 있어 ‘집’이고 골목이 있다. 암자를 지나자 어느 펜션 담벼락을 넘실거리고 있는 진하고 연한 보라색 콩꽃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마을을 한 바퀴 돌아 월성 쪽 대로로 나오면 ‘제주댁 잔치국수’ 집이 있다. 잔치국수 한 그릇에 4000원, 곱빼기는 5000원으로 수년째 성업 중인 곳이다. 작은 창으로 월정교와 서욱마을이 보여 전망이 좋은 가게다. 조금 더 걷다보면 ‘들꽃향기 고운 차와 도자기’라는 전통찻집도 도로변에 연접해있다. ‘문천길’, ‘반달길’ 이라는 도로명을 가진 골목에서 마주치는 주민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푸근하고 인정스럽다. 오랜 시간 옹기종기 삶의 궤를 함께 했을 서욱마을엔 고대의 흔적이 고스란해서, 한 번쯤 들러 쉬어가도 좋을만한 작지만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