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서 국도 4호선을 따라 건천방면 모량리를 지나 유명한 고분군이 있는 마을이 나타난다. 바로 금척리(金尺里)인데, 신라시조 박혁거세가 신인으로부터 받았다는 신비의 금자(金尺)가 묻혀있는 곳이라고 전해져 ‘금척(金尺)’으로 불린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이 마을 서쪽으로는 경부고속도로가 나 있으며 마을 가운데로는 중앙선 철도(건천역~모량역)가 관통하고 있다. 마을을 지나가는 철도를 중심으로 서편에 위치한 마을이 곡산 한씨들의 집성촌인 ‘웃마을’, 동편은 영천 이씨들의 집성촌인 ‘아랫마을’, 아랫마을 북쪽에는 순흥 안씨들의 집성촌인 ‘새각단’,
금척고분군 남쪽에 하천을 끼고 있는 ‘오방골’ 등 네 개의 자연부락이 금척리를 이루고 있다(블로거 천년햇살에서 참조). 금척리 주민들은 주로 논농사 외 포도농사를 짓고 찹쌀보리단지로도 유명하며 버섯을 생산하는 농가들도 다소 있다고 한다.
멀리 금척리고분군 바깥 외부 대로에서 이 마을을 바라보면 마을이 자그마하고 아기자기하게만 보였다. 하지만 금척리의 위상은 골목안으로 잦아들어야 보인다. 고분군의 명성만으로 이 마을을 평하기에는 문화 자산과 유산이 널려있는 ‘큰’ 동네였다. 마을길도 여느 시골길과는 다르다. 넓고 번듯한 골목길이 시원스레 연결되고 마을 어디서든 이야깃거리가 넘쳐나는 알짜배기 명품 동네였다.
-금척리(金尺里)...네 개의 자연부락단위로 집성촌 형성 금척리가 있는 건천읍은 경주의 서북쪽 12km지점에 자리 잡고 있으며 영산 단석산과 오봉산 및 문화유산이 산재한 충의의 고장이다. 금척리는 네 개의 자연부락이 마을을 이루고 있는데 ‘웃마을’은 곡산 한씨(谷山韓氏)가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위쪽에 있으므로 ‘상리’ 혹은 ‘웃말’이라 한다. ‘아랫마을’은 영천 이씨(永川李氏) 집성촌으로 아래쪽에 있어 ‘하리’ 혹은 ‘아랫말’이라고 한다. ‘새각단’은 순흥 안씨(順興安氏)가 모여 사는 마을로 아랫말 북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해 ‘신리’ 혹은 ‘새각단’이라고 한다. ‘오방골’은 약 80년 전 이곳에 사과밭이 일구어지면서 생긴 마을로 다섯 갈래의 길이 통하므로 ‘오방곡’ 혹은 ‘오통골’, ‘오통곡’이라고 부른다.
-‘절부안동권씨표려비’, ‘제극정(制克亭)’, ‘부자신도비’, ‘만취정(晩翠亭)’, ‘옥화정(玉華亭)’ 등은 마을의 위상과 전통 드높여 금척동회관 앞에서 한 어르신을 만났다. “한 동네에 곡산 한씨, 영천 이씨, 순흥 안씨 등 성씨가 다른 세 성씨의 재실을 가진 동네가 잘 없어요. 옛날에는 타 성씨가 거의 없었는데 요즘엔 다른 성씨 사람들도 많이 들어왔어요(웃음). 그래도 우리 동네는 세 성씨가 아직 많은 편이지요” “농촌치고는 교통이 이렇게 좋은 곳이 잘 없을 겁니다. 신경주역 가깝고 지방국도와 철로가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금척고분군이 있는 동네라서 자부심이 남다르지요. 어릴적 여덟살인가, 아홉살일 때 고분 사이의 원래 도로가 아주 좁아 도로를 확장하기위해 금척고분 두 기를 발굴했는데 말안장과 금들이 나왔어요. 살림살이용 고기(古器)는 트럭 한 대 이상 나왔던 걸로 기억해요. 그리고 예전에 밭고랑을 파도 고기(古器)가 나올 정도였어요”
금척주유소 바로 옆 도로변 안쪽에는 열녀각이 하나 있다. ‘절부안동권씨표려비’가 그것이다. 조선시대 최남일의 아내인 열부 안동 권씨를 기리기 위해 1936년에 세웠다는 이 비는 1972년 도로확장 때 지금의 위치에 옮겨졌다.
이 밖에도 이 마을의 위상과 전통을 높이는 선현들의 자취가 사표로 전해지는 곳도 많다. ‘제극정(制克亭)’은 조선시대 병조판서와 이조판서를 거친 곡산인 정포 한옹을 추모해 그의 후손이 1948년에 건립한 정자며, 금척상리길에 있는 ‘부자신도비’는 평절공 정포 선생과 그의 아들 문절공 유선 한권 선생의 공을 기리는 비다. 부자의 신도비가 나란히 설 수 있다는 것에 당시 이 가문의 위세를 가늠케 한다. ‘만취정(晩翠亭)’은 400여 년 전 영천인 만취 이시강이 강학하기 위해 금척리 385번지에 세운 정자로 허물어진 것을 1936년 후손들이 다시 세웠다고 한다. ‘옥화정(玉華亭)’은 순흥인 문토 안상진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1937년에 세운 정자다.
-‘경주문예대학’ 설립한 고(故) 구림 이근식 선생댁과 시비도 금척리에 있어 금척고분길을 걷다보면 초록색 대문 오른쪽에 크고 오래돼 보이는 목련 나무가 서 있는 집이 보인다. ‘칠평댁’ 이라는 택호만 대도 이 마을 어르신들은 다 안다고 하는 이 집은 경주를 대표하는 시인의 집이다. 정남향의 햇살 바른 이 집은 바로 고(故) 구림(丘林) 이근식 시인의 집이다. 정남향의 마당엔 가을 햇살이 가득한데 시인은 먼 길 가고 없다. 2017년 고인이 된 시인의 심성마냥 단아하게 잘 가꿔진 마당에는 화초들이 정연했다. 선생의 시비가 동구 밖 금척고분군 지척에 있으니 이는 2013년 제자들이 구림 선생이 생활하시던 금척리 입구에 ‘고분공원에서’라는 선생의 시를 새겨 세운 것이다. 시인 이근식 선생은 1928년 이곳 금척리에서 태어나 평생 이곳서 생활했다. 1994년 경주문인협회 부설 ‘경주문예대학’을 설립하는 등 평생 문학의 본향인 경주 문학의 맥을 잇기 위한 노력을 경주한 시인이었다.
시인의 집을 지나자 작은 오솔길 끝에 탱자나무 울타리가 둘러쳐진 주택 한 채가 비어진 채 방치돼 있었다. 남서향 두 채로 구성된 이 집은 마을선 위상이 높아뵈는 집이었다. 금척고분길 골목 어귀에서 여름에 수확한 보리질굼을 따가운 볕에 말리며 손질하고 있는 한 할머니를 만났다. 이웃과도 나눠먹는다는 할머니는 83세인데도 고우셨다. 이 마을서 산 지 60년이라는 할머니는 “이 집서 평생 살았어요. 몇 년 전까지는 집 근처 1000평 밭에 참깨, 콩 농사를 혼자서 다 지었어요. 이젠 몸이 아파서 지을 수 없지요. 이 동네가 워낙 넓어요. 이래봬도 약 300여 세대가 살아요. 경로당도 두 군데나 되고요. 노인들은 돌아가시고 이 동네도 이제 타 성씨들이 많이 살고 있어요”라고 했다.
-‘금척정미소’와 양곡 창고...“건천서 정미소가 반 이상 줄었는데 우리 동네엔 아직 남아있지요” 또 한 골목길에선 ‘금척정미소’ 라는 간판글씨가 어렴풋하게 보이는 정미소를 만났다. 이 정미소는 개인에 양도됐지만 지금도 운영되고 있다고 했다. “마을에 이 정미소를 운영하는 분이 계십니다. 건천서 정미소가 반 이상 줄었는데 우리 동네엔 아직 남아있지요. 요즘은 벼 수확시 공동수매로 넘어가 실제로 가공할 것이 별로 없어요. 수매하기 15년 전까지는 일거리가 많았어요. 올해도 보리도 찧고 했지요. 옛날에는 이 정미소에서 국수면도 뽑았어요. 버얼건 면발의 국수가 맛있었지요” 길을 지나던 주민들의 전언이다.
정미소 바로 맞은편에는 양곡 창고가 있었다. 또 ‘금척 슈퍼’라고 쓰인 작고 허름한 가게도 있었지만 지금은 문을 열지 않는 것 같았다.
금척교회 주변에는 전원과 잘 어울리게 지은 주택들이 여러 채 보였는데 새로 유입된 주민들이 살고 있다고 했다. 나란히 신축한 유럽풍 집들 몇 채는 너른 마당과 텃밭을 가져 넉넉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금척주유소’와 ‘만석 수타면’, ‘금곡 추어탕’ 등의 식당들도 주택들 사이사이에 있어서 농촌마을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마을 중앙의 철도신호 건널목을 지나니 바로 이 마을의 당산나무가 나타났다. 금척리 343번지에 있는 이 나무는 수령 400여 년의 느티나무로 경주시가 1982년 보호수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주민들은 시가 세운 기념비에 수령이 300년으로 잘못 적혀 있다며 시정을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주민들은 수령이 오래된 이 당산나무를 안타까워 하다가 몇 년전부터는 해마다 막걸리를 붓고 영양제를 주입하는 등 세심하게 관리하고 있다고 했다. 이곳에선 아직도 매년 정월에 동제를 지낸다. 최근 금척리 주민들의 관심사 중 하나로 부각되는 이슈가 있다. 경주시가 금척리 고분군 가운데 한 곳을 발굴하고 관람시설을 설치해 관광자원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는데 한국문화재재단에 기본계획 용역을 맡겨, 고분군의 성격과 학술 가치를 잘 드러낼 수 있는 발굴대상을 선정하는 단계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경주 주변 외곽에서 고신라시대의 대형봉토분들이 가장 많이 밀집해 있는 고분군이 있는 금척리. 그 이름만으로도 화려하다. 금척리여 다시 부흥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