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시란 실제경험이나 체험을 토대로 씌어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해도 그만큼한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그 사정을 잘 알아야 한다. 바보가 어떻게 옳은 판단을 하며 장님이 하늘을 나는 새를 볼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보면 이 시인이 농훌치는 사랑의 진미(眞味)를 모른다는 것은 거짓말인 것 같으다. 왜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훔친 사과가 더 맛있다`는 말 들어보았는지. 나는 들어 보았다. 이 말 역시 남의 사과를 훔쳐 먹어봤기에 하는 소리가 아닌가 싶다. 그렇지 않다면 `훔친 사과가 더 맛있다고 하더라`라는 문장이 되어야하니까 말이다. 이 시에서 말하는 시인은 앞에서 잠깐 예시한 `훔친 사과`가 아닌 `썩은 사과`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썩은게 아니라 적당히 썩은 부분도 있어 잘 길들여진 맛을 내는 사과다. 그리고 `한 남자가 오랫동안 공들여 길들여 온 여자` 즉 그런 `사과`라고 했다. 몰라 여자라고 해서 모두 이런 사과일까? 생각해 봄직도 하거니와 지금, `뼈도 마디도 없는` 사과벌레가 사과의 `몸에 길을 내었`다. 한두 번이 아니다. 시인의 표현에 의하면 ` 수천 번`의 길을 냄으로서 사과 역시 수천 번 자지러지는 절정을 거쳤던` 것이다. 무엇이든 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걸 바라보는 눈이나 사유하는 몫이 일반적인 보편성이나 논리를 뛰어넘어야 한다 물론 이 시는 흔한 그리움이나 달콤한 사랑따위를 넘어서 있다는데 주목에 값하며, 서정주의 초기 관능미를 잘 살린 시들에 비유한다면 관능미나 육감적인 그것에 매달려 있는 시풍(詩風)도 더더욱 아니다. 생(生)이라는게 어떤 것인가를 넌지시 보여주는, 즉 인간생활의 중심을 차지하는 내면세계를 보여주면서 간과해서는 아니될 삶의 한 면으로 처리하고 있다는게 신선하게 비친다. 문장표현에 있어서나 구성 역시 잘 짜여져 완벽한 언어구사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도 특징으로 꼽힌다. 튀어나 보이거나 설익어 보이거나 난삽함마저 전혀 배제된 무르익은 문장구가라는 것도 쉽지 않은게 요즘 현실이고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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