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경주 일대의 유적 조사를 담당하던 일본인 와타나베 아키라(渡邊彰)와 스에마쓰 구마히코(末松熊彦)가 이곳 감산사터 논바닥에서 석조미륵보살상과 아미타여래상을 발견하였다. 이 불보살상의 광배 뒤에 새겨진 조상기(造像記)를 판독하면서 이곳이 『삼국유사』 「탑상」편 ‘남월산’조의 감산사지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총독인 테라우치(寺內正毅)가 총독부 시정 5주년을 기념하여 1915년에 경복궁에서 개최된 조선물산공진회 특설미술관에 이 2구의 불보살상을 옮겨 전시하였다. 이후 이 특설미술관이 조선총독부박물관이 되면서 그 박물관의 수장품이 되고 해방이 되면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계속 소장하고 있다.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국보 제81호로,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은 국보 제82호로 지정되어 있다. 미륵보살상에는 381자의 명문이, 아미타불상에는 392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명문의 일부 내용이 『삼국유사』 「탑상」편 ‘남월산’조에도 인용되어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조상기를 잘못 읽어 몇 군데 오자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전체를 옮긴 것도 아니었다. 석조미륵보살입상 광배 뒷면의 명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성덕왕 18년(719) 중아찬 김지성(金志誠)이 고인이 된 아버지인 인장 일길찬과 어머니 관초리 부인을 위해 감산사에 아미타상과 미륵보살상을 삼가 조성하였다. 김지성은 좋은 세상을 만나 영광스러운 지위를 역임했는데 지략이 없는데도 시속(時俗)을 바로 잡으려다 겨우 형벌에 걸려드는 것을 면했다. 나이 67세에 조정에서 임금을 받드는 일에서 벗어나 시골로 돌아왔다. 이어 다시 임금의 명으로 왕도의 바쁜 업무를 맡아 세속에 물들고 있었으나 속세를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버릴 수 없어 전 재산을 기울여 감산의 가람을 건립하였다. 국왕의 만수무강과 그의 죽은 부모, 전처·후처·아우·제매 등 일가족과 이찬 김개원의 복을 빌기 위해 이 절을 세웠다. 돌아가신 어머니 관초리 부인은 66세에 고인이 되어 동해 바위에 유골을 뿌렸다. 석조아미타불입상 광배 뒷면에 새겨진 조상기도 석조미륵보살입상 조상기와 그 내용이 대동소이하다. 단지 끝부분 일부에 미륵보살상 조상기에는 없는 내용이 있다. 그 대강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성덕왕 18년(719) 내마 총(聰)이 짓고 왕명을 받은 사문(沙門) 석경융과 대사(大舍) 김취원이 교지를 받들어 썼다. 아버지 인장 일길찬이 47세에 돌아가셔서 동해 흔지(欣支) 해변에 뿌렸다. 김지전(金志全) 중아찬은 삼가 살아생전에 이 선업(善業)을 지었다. 나이 69세에 돌아가서 이를 조성하게 되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금당의 주불을 아미타상이 아닌 미륵존상이라고 하였다. 미륵보살을 자씨보살(慈氏菩薩)이라고도 한다. 한자 ‘慈’는 어머니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미륵보살상은 어머니를 위해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버지를 위해서는 아미타상을 조성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불상은 『아미타경』에 따라 강당에 안치한 본존으로 추정된다. 아버지를 상징하는 불상보다는 어머니를 상징하는 불상을 상대적으로 격이 높은 금당에 모신 것이 요즈음 세태와는 차이가 있어 흥미롭다. 그리고 조상기를 지은 사람이 총(聰)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설총(薛摠)으로 추정되고, 발원자가 김지성에서 김지전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기록에 착오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김지전의 가족이 김지성과 일치하는 점 등으로 미루어 김지성이 후에 김지전으로 개명을 했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조성하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창건했는데, 김지성은 어머니를 위해 미륵보살상, 아버지를 위해 아미타불상을 조성했다. 그리고 일부에서는 김대성과 김지성의 이름 마지막 글자가 ‘성’자이기 때문인 듯 사촌 간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김대성의 ‘성’은 한자로 ‘성(城)’, 김지성은 ‘성(誠)’자를 쓴다. 하지만 당시 이두로 표기할 때 훈(訓)은 별 의미가 없기도 하다. 김대성은 700년에 태어나서 774년에 죽은 것으로 추정되고, 김지성은 652년에 태어나서 720년에 죽었기 때문에 사촌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이에 대해서는 믿을만한 근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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