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엽가가 표의문자로 되어 있다는 것은 뜻밖의 사실이었다. 지난 1000여년 동안 표음문자라는 입장이 화강암처럼 굳게 고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표의문자로 가는 길은 아무도 가보지 못한 낯선 길이었다. 2법칙이란 ‘향가의 문자들은 한국어 어순으로 배열되어 있다’라는 것이다. 향가의 어순이 어떻게 씌어 있는지는 누가 연구자이던 간에 연구 초기부터 의심해보았어야 한다. 세계 여러 민족의 언어사를 살펴보면 한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어순이 통째로 바뀌는 경우가 왕왕 발견되기 때문이다. 주로 다른 민족과의 접촉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데도 향가가 우리말 어순에 따라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근거도 없이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필자는 향가를 연구하면서 지금까지 제시되어온 여러 주장에 대해 근거가 없으면 의심한다는 입장을 취해왔다. 백 번의 주장보다 확실한 근거 하나가 낫다. 그랬기에 향가의 어순 문제에 대해서도 의심으로부터 시작했다. 의심의 끝에 가서야 향가가 현대 한국어 어순에 따라 나열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굳힐 수 있었다. 근거는 경주에서 발견된 돌 하나였다. 필자가 주목한 그 돌은 길이 약 30㎝, 너비는 윗부분이 12.5㎝ 크기로 지금 국립경주 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돌은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이라는 못생긴 이름을 가지고 있다. 임신년의 맹세를 기록했다는 뜻이다. 보물 1411호다. 그 돌은 일제강점기 조선 총독부 박물관 경주 분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오사카 긴타로(大阪金次郞)라는 관리에 의해 발견되었다. 경주 석장사 터 인근을 걷던 중 땅에 묻혀 윗부분만 드러난 냇돌 하나가 눈에 띄었던 것이다. 돌을 파내자 빼곡하게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전문적 판독 결과 다섯 줄 74자였다. (사진 참고) 壬申年...二人幷誓記 天前誓 今自三年以後 ...誓三年 임신년...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해 기록한다. 하늘 앞에 맹세한다. 지금부터 3년 이후에...맹세하되 3년으로써 하였다. 서기 552년 경 두 사람의 화랑이 충성을 맹세하며 새겨 놓은 글자다. ‘지금부터 삼년’을 ‘今自三年’이라고 새기는 등 한국어 어순에 따르고 있었다. 중국식 한문이라면 ‘자금삼년(自今三年)’이라 해야 할 것이다. 필자의 이름을 영어로 쓰는 것에 비교한다면 Y.H.KIM이라 새기지 않고 KIM.Y.H로 쓰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서기 500년대 신라인들은 글을 쓰면서 중국을 따르지 않고 한국어 어순대로 쓰고 있었다. 신라인들이 문자의 표기와 관련해 이루어 낸 이 법칙은 ①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의 한자들을 선정하고, ②그것을 한국어 어순에 따라 배열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표기 방식을 가볍게 보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필자는 이 표기법을 우리 민족이 세종대왕 이전에 이루어낸 국문학적 대성취라고 보고 있다. ‘나랏말씀이 중국에 달라 서로 사맛디 아니할 새’라는 한글창제의 정신이 이미 신라시대에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체를 ‘임신서기석’이라는 돌의 이름에서 따와 ‘서기체’라고 하고 있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한국인이 가진 문자에 대한 재능을 주목한다. 그는 한글에 대해 ‘독창성이 있고 기호·배합 등 효율성에서 각별히 돋보이는,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 문자’라는 말을 공공연히 입에 달고 세계를 돌아다닌다. 급기야 세계적 명저 <총, 균, 쇠> 서문에 우리민족을 천재라고 까지 한다. 한글을 가리켜 ‘한국인의 천재성에 대한 위대한 기념비’라고 한 것이다. ‘서기체의 창제’는 재레드 교수가 지목한 문자에 대한 민족의 천재성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대사건이다. ‘서기체의 창제’는 훗날 한글 창제로 이어지는 위대한 탄생의 서막이었다. 민족 문자 한글 탄생에 앞서서, 민족의 문장 표기법이 먼저 탄생한 것이다. 민족 문장의 위대한 탄생을 입증하는 임신서기석을 보물 1411호에 머물게 해서는 아니 된다. 필자는 무가지보(無價之寶) ‘훈민정음 해례본’과 커플로 하여 국보 1호로 승격시킬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인류문화재인 향가와 만엽집을 풀어낼 단초를 열어 주었다는 점에서 임신서기석은 이집트 문자 해독의 문을 열게 한 로제타스톤의 가치와 비교해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영국 대영박물관은 로제타스톤을 극진히 모시고 있다. 우리라고 못할 것이 없지 않는가.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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