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팔자에 역마살이 끼었으면 이사를 자주 다닌다고 한다. 나도 그렇게 역마살이 낀 모양이다. 숱한 이사를 하고, 여러 곳에서 살다 지금은 경주에 안착하였다. 부초(浮草)처럼 떠돌며 살아온 지난날들을 돌이켜본다.
지금은 나와 내 가족들 모두의 본적지(등록기준지)는 경주이나, 나는 원래 대구 토박이다. 부모 양계에서 모두 임진왜란 무렵부터 대구에 살아왔다. 여기에서 쭉 살다 18세가 되어 서울로 대학 유학을 떠났다. 그래서 15년 가까이 서울에서 사는데,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를 여기서 모두 보낸 셈이다. 대학 다닐 때 하숙집을 자주 옮겨 다녔는데, 이삿짐을 리어카에 싣고 다닌 기억이 아련하다.
나중에 판사로 서울지역에서 근무하다 1988년에 경주지원으로 발령받았다. 개인 사정으로 분황사에 기거하였는데, 심한 우울증으로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러다 한국 법관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에 파견되어, 동경에서 살았다. 이때의 경험은 내 인생에 아주 색다른 시각을 제공해주었다. 귀국 후 대구 법원으로 옮겼다가 항명파동을 일으키며 법관직에서 축출되었다. 그것이 1993년 여름인데, 그 조치가 너무 과하다는 말이 사법부 내부에서 일었다. 다시 법관으로 재임명된다는 말이 있어 그 여름과 가을, 겨울을 계속 기다렸으나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나 자신 다시 법관으로 일하는 것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여, 엄동설한에 겨우 걸음을 걷는 어린 딸과 아들의 손을 잡고 경주로 왔다. 아이들의 외가곳이기도 한 경주로 내려오며, 여기서 뼈를 묻을 때까지 다시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변호사를 할 처음에는 대법원장과 싸우고 법원을 나온 사람이라는 말이 떠돌며 누구도 사건을 맡기지 않았다. 경주경찰서에서는 수시로 내 사무실을 찾아와 체크를 하였다. 그러다 판사와 검사들 사이에서 나에 대한 동정론이 일고, 또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대구와 경북 지역을 통틀어 단순히 사건수임건수로 친다면 랭킹 1위의 변호사가 되었다.
그러나 변호사를 5년 정도 짧게 하다가 효성가톨릭 대학에서 법학교수로 초빙을 받았고, 또 이어서 경북대학이 로스쿨 창설을 준비하며 창설요원의 한 사람으로 나를 선발하였다. 서울 소재 유수의 대학에서도 초청을 받았으나, 경주에서의 삶을 중히 여기며 거절하였다.
그런데 대학교수가 되니 서울에 갈 일이 많아졌다. 더욱이 2007년에 한국헌법학회의 회장으로 선출된 이후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서울에 가야했다. 부득이 대구에 전셋집을 얻어 이사를 하였으나, 경주집은 그대로 두었다.
대학교수 생활을 하며 미국에 1년 좀 넘게 식구들과 다녀왔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옛날 로마제국의 후예이고, 미국을 중심으로 온 세상이 돌아간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아이들 셋은 이때 모두 직독직해로 영어를 깨쳐 이후 영어에 관한 한 큰 어려움 없이 자라날 수 있었던 것이 무척 다행스럽다. 그 후 중국에도 잠시 다녀왔는데, 당시 경주중학 1학년이던 아들놈이 사춘기를 너무 티나게 하여 학교의 양해를 얻어 학기 중에 덥석 안고 베이징에 가버렸다.
2018년 20년 남짓의 대학교수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경주로 내려왔다. 길게 지속되었던 역마살이 이제야 끝났다. 이곳에서 변호사로 조금씩 사건을 처리하고, 농사일을 한답시고 한다. 매일 일찍 일어나 집 옆의 밭에서 땀이 흐르도록 노동을 하는데, 이것이 주는 충일감은 대단하다. 또 이곳저곳 들어오는 원고청탁을 받아 글을 쓴다. 인터넷 세상이 되어 시골에서 살아도 거의 불편함이 없이 세상과 소통한다. 무엇보다 부드러운 곡선의 경주 산하(山河)가 빚어내는 독특한 분위기에 흠뻑 젖을 수 있는 것이 기쁘다.
노자가 말한 부쟁이선승(不爭而善勝)의 삶을 꿈꾼다. 남과 다투는 일 없이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떠돌이 생활을 끝내고 경주에서 이렇게 한가로이 사는 것에 하루에도 몇 번씩 감사하는 마음이다. 이리를 둘러봐도 저리를 둘러봐도 곳곳에 감사해야 할 덩어리가 눈에 띈다. 모두 경주와의 인연에서 생긴 것들이다. 환하게 비치는 축복의 빛을 늙은 몸 안으로 깊숙이 받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