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행
백무산
운문재 넘다 비 만났다흠뻑 만났다바람 그늘을 서늘하게 거느린 비수십만평 한다발로 퍼붓는 비만난 게 아니라 먹혔다한점 피할 곳 없는 고갯길​달려도 웅크려도 물구나무를 서도피할 길 없는 비의 창살젖은 게 아니라 갇혔다갇힌 게 아니라 비에게 뜯어 먹혔다​나무 한그루 피할 곳 없는 초원이라면그곳에서 마주친 맹수라면공포는 잠깐 기꺼이 그에게 먹혀야 하리뜯어 먹혀 그들 무리가 되리​피할 수 없는 날은 오지 먹고만 살았으니 먹혀야 하지운문의 아가리에 들어가야 하는 날이​고요는 비바람 회오리처럼 오네
-삶은 운문행이라는 화두
피할 곳 없는 길에서 비를 만나본 적 있는가? 후두둑 두들기는 비에 속수무책 맞다가 아예 비와 한 몸이 될 정도로 젖어본 적은?
운문재를 넘다가 “수십만평 한다발로 퍼붓는 비”를 만난 경험을 담고 있는 이 시의 묘사는 ‘상像’을 확대하기에 가장 좋은 예다. “바람 그늘을 서늘하게 거느린 비”는 비가 쏟아지기 직전의 상황에 대한 정확한 묘사다. 그러나 이어지는 “만난 게 아니라 먹혔다”에 이르면 시상이 아연 확대된다. 나아가 비에 젖는 모습은 “달려도 웅크려도 물구나무를 서도/피할 길 없는 비의 창살”에 갇히는 것으로, “뜯어먹”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먹히다니. 비가 내게 달려들어 먹는다는 것이다. 비가 한 마리 맹수가 되는 지점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뜯어 먹혀 그들 무리가 되리”에서는 우리가 죽어 비로 흩어짐을 암시한다. 불교적 인연관이다. 깨달음을 동반한 묘사의 변화와 전환이 이 정도라면 한국시의 한 정점이 아닐까. 우리는 비에 먹히는 것일까? 시인은 넌지시 우리의 욕망을 질타한다. “먹고만 살았으니 먹혀야 하지”. 비는 운문(구름의 문)을 부르고 그것은 “운문의 아가리에 들어가야 하는 날”로 건너뛰어 죽음을 암시함을 어렵지 않게 확인하게 한다. 먹느라 뚱뚱하다 못해 비대해진 우리들 욕망. 그러나 그런 날은 오고야 말지. 우습지 않은가? 아니 허망하지 않은가? 아무리 “웅크려도 물구나무를 서도 피할 길 없는” 죽음이 우리를 먹어치우는, 그래서 우리도 운무로 흩어지는 날이 온다는 것. 그러니 우리 삶은 알고 보면 운문행이지 않겠는가. 이 삶의 고요는, 이런 깨달음은 “비바람 회오리처럼” 급습하듯 오는 것이니.